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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날이 되었다. 수술 스케줄은 오후 4시. 그날의 마지막 순서였다.
"여보세요?"
오빠랑 교대한 간병인이었다.
"따님, 나 미치겠어."
"아... 왜 그러세요?"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가 밤에 잠을 안 자. 틈만 나면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해서 내가 아주 죽을 고생을 했어... 말도 좀 많은 게 아냐. 병실 사람들이 잠을 설칠 정도라니까. 나 이런 식으로 하면 간병 못해요."
간병인이 지금 그만두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 나는 아기에게 묶여 있고, 오빠는 올해 연차를 거의 다 쓴 상태였다.
"죄송해요. 뇌가 부어서 그런 것 같아요. 원래 말 없고 얌전하신 분인데... 내일 수술이니까 조금만 참아주세요."
"휴... 내가 딸 사정 딱해서 봐주는 거야. 원래 간병비에서 3만 원 더 얹어줘. 16만 원. 이 정도면 하루에 20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나는 조금만 받는 거야."
"네 드릴게요 여사님. 감사합니다. 조금만 더 애써주세요."
가슴을 쓸어내렸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
엄마가 입원하면서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짜증나는 건 보호자 교대가 까다로워 간병인을 24시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병원은 상주보호자 1인 체제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외부 간병인이든 가족이든, 환자의 보호자는 딱 1명만 허락되었다.
환자 얼굴을 보고 싶으면 상주보호자로 교대해야만 가능한데, 그러려면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하고 다음날 나오는 음성 결과지를 제출해야 병실에 들어올 수 있다. 병원을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병실에 다시 들어올 수 없다. 다시 PCR 검사를 하고, 다음날 음성검사지를 들고 와야 출입이 가능하다.
팬데믹이 심할 때야 그렇다 쳐도, 위드코로나가 된 지 한참 됐는데도 왜 이 규정은 안 바뀔까? 심지어 이제 보건소에서는 PCR 검사도 잘 안 해준다. 환자 간병 때문에 필요하다고 해도 PCR 검사를 안 해주는 보건소가 많다. 그럼 돈을 주고라도 사설 기관에서 받으면 될 것 아니냐? 검사비를 7~10만 원씩 받고 PCR 검사를 해주는 2차 병원들도 있지만, 자기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와 보호자만 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환자를 만나거나 간병하려면 PCR 검사를 꼭 해야 하는데, PCR 검사를 해주는 곳이 없다. 검사해주는 곳도 없는데 그놈의 PCR 음성 결과지는 왜 이렇게 죽어라고 요구하는지? 그럼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해주면 될 것 아닌가?
G대학병원은 해주지 않았다. 자기 병원 입원 환자들인데도. (정문 앞 텅텅 빈 선별진료소는 대체 왜 운영하는지?) G대학병원에 입원하려면 보건소에 가서 PCR 검사를 받고 와야 입원을 시켜준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는 경우는 일반 병실로 옮길 때 환자와 보호자에게 딱 한 번, 그것도 3만 5천 원을 받고 해 주고, 그 이후 보호자 교대를 위한 PCR 검사는 해주지 않는다.
아주 위독한 환자의 경우도 똑같다. 가족이 들어오려면 PCR 검사서를 제출해야 한다. 새벽에 연락받은 가족들은 급히 PCR 검사해 주는 곳을 찾아다니고, 게다가 음성 확인이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을 또 기다려야 한다. 그놈의 PCR 검사받으려고 가족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와중에, 어떤 환자들은 더 버티지 못하고 가족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코로나 시대의 죽음은 정말 초라하다. 임종 시에도 곁을 지킬 수 있는 가족도 단 몇 명에 불과하다. 병원이 코로나를 핑계로 자기들 편의만 고집하지 않았어도 죽음이 이렇게 초라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열 명이든 스무 명이든 코로나만 안 걸렸으면 환자를 보러 들어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코로나 음성 & 인원제한까지 걸어서 마지막 가는 길마저 못 보게 야박하게 구는가?
또 이런 체제는 간병인의 수요를 폭발하게 만든 요인이 되기도 한다. 보호자 교대가 이토록 까다롭기에, 대부분의 환자는 간병인이 24시간 돌볼 수밖에 없다. 좋은 간병인이 더 많겠지만, 나쁜 간병인이 걸려도 가족들은 알 길이 없다. 감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돌봄은커녕 잠만 자고 핸드폰 들여다보는 사람, 환자에게 고성과 폭언을 일삼는 사람, 심지어 폭행하는 사람 등 별 사람이 다 있다. 말없이 잠수 타는 사람도 종종 있다. 피해는 환자의 몫이다.
심지어 그마저도 구하기 어렵기에, 간병비는 부르는 게 값이다. 2023년 초 서울 지역 1일 간병비 평균은 12~14만 원(케어가 어려운 환자는 20만 원을 초과하기도 한다) 선으로, 열흘이면 150만 원에 육박하고 한 달이면 400만 원이 넘는다.
이 금액도 아찔한데 딱 이만큼만 드는 것도 아니다. 환자 케어가 어렵다면서 약속한 금액에 얼마를 더 달라는 경우는 예사고, 유류비, 유급휴가, 각종 간식과 식대 등을 청구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2일 일하고 3일 치를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퇴원 시간이 좀 늦어져서 그날 다른 일을 못 구했으니 그걸 보전하라면서. 이것저것 달라는 대로 주다 보면, 그야말로 간병파산이 코앞에 닥치는 것이다.
큰 병에 걸리면 신체적 고통은 물론이요, 부차적으로 감내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신체적, 감정적, 재정적 어려움이 동시에 닥친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이런 식이면 환자에게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오후 5시가 넘었다. 앞 수술이 예정보다 길어져 스케줄보다 늦게 엄마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우리 자신만만 교수님 말대로 성공 확률이 99%이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 수술실에서 연락 없어?
병원에 있는 오빠에게 카톡을 보냈다. 코로나 규정 때문에 수술실 앞에서 가족이 대기하지 못한다. 수술 중에 가족은 병원 안이나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연락이 오면 중환자실 앞으로 가야 한다.
- 아직 없어
미주 이모는 수술실 앞에서 대기 못 하는데도 기어이 병원에 갔다. 같은 공간에라도 있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단다. 나는 이번에도 아기를 돌보느라 가지 못했다. 지난번 엄마 수술 때는 만삭이어서 가지 못했는데...
난 아기를 재워놓고 옆에 누웠다. 엄마는 내 인생의 굵직한 이벤트 때마다 이랬다. 결혼식 준비할 때 엄마랑 드레스도 보고 살림살이도 고르고 싶었는데, 엄마는 신장을 떼어내고 항암치료를 견디고 있었다. 만삭일 때는 엄마 밥 먹으면서 뒹굴대고 싶었는데, 엄마는 폐 하나를 떼어내고 항암치료 중이라 오히려 내가 엄마를 못 돌보는 걸 미안해해야 했다. 이제 신생아 키우면서 엄마 도움이 절실한데 또 이렇게 수술을 받다니... 게다가 엄마는 거의 아기로 돌아가 하나부터 열까지 도움을 필요로 했다.
내 인생이 어쩌다 이리됐을까? 이십 대 후반까지만 해도 좋은 삶이었다. 일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목표를 대부분 성취하면서 조금은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까지 있었던 것 같다.
삼십 대에 들어서자 무슨 이런 시건방진 애가 다 있냐는 듯 세상에게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남자친구의 배신, 여러 번의 퇴사, 아빠의 사업 부도, 부모님의 이혼, 경제적 어려움, 엄마의 암 발병까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속속 터졌고, 나서서 해결하고자 할수록 더 꼬여버렸다. 뼛속까지 무력해졌다. 서서히 깨달았다. 나는 특별히 잘난 게 아니었다. 그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운이 따라줘서 잘 풀린다 착각했을 뿐, 이제 맨몸으로 세상에 부딪히면서 내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수술 시작 후 거의 다섯 시간이 지나서 엄마의 수술이 끝났다. 수술이 아주 잘 되었다는 소식을 오빠에게 전해들었다.
잠든 아기의 얼굴을 보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다 잘될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힘든 일이 있어도 다 지나가기 마련 아닌가. 이번에도 다 지나가고, 금세 괜찮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