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고통이다. 나에게 글은, 잔잔한 컵 아래 가라앉아 있던 흙을 흔들어 흙탕물로 만드는 작업이다. 깨끗한 물은 어느새 사라지고, 내 과거의 상처와 직면해야 하는 일이다.
부부싸움을 했다. 결혼 전 각방은 안 쓰겠다던 신랑이 이불을 들고 나가버렸다. 밤새도록 혼자 울었던 날이었다.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른 느낌에 병원을 갔다. 양수가 터졌다고 한다. 보통 양수가 터지면 유도분만을 해서 출산을 한다. 하지만 신랑과 나는 대구 모병원에서 르봐이예 분만을 위해 사전에 교육을 받은 상태라 병원에서는 우리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통도 없이, 촉진제도 없이 자연출산을 꿈꿨던 나는 기다리면 아이가 나올 줄 알았다. 고민하는 동안 마취과 선생님은 퇴근해 버렸고, 다음날 새벽 6시가 되어야 출산을 할 수 있었다. 양수가 줄줄 나오는 상황에서도 나는 자연출산을 포기하지 않았고, 기저귀를 차고 밤새도록 병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앞만 보고 달렸나 보다.
29시간의 진통을 겪었다. 힘도 못 주는 데다 양수도 부족해서 하늘이 노래지는 걸 경험했다. 태어난 아기는 골반에 장시간 끼어 있어서 머리는 초승달 모양이었고, 몰골은 너무 안쓰러웠다. 보통 이렇게 애를 쓰다 마지막에 제왕절개를 한다는데 나는 자연분만을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아이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들어갔고 내 고집이 얼마나 아이를 위험하게 했는지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분만실에서 나왔을 때 아버님을 만난 순간이 기억난다. 29시간의 진통으로 얼굴과 몸은 퉁퉁 부어있었다. "애가 애를 낳았구나. 애 많이 썼다." 어머님도 알뜰살뜰히 싸 오신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주셨다. 친정 부모님은 언제 오시나.
출산한 날은 추석 명절이었다. 여동생과 남동생이 나를 보러 왔다. 친정 부모님은 외갓집에 갔다고 한다. 그럼 퇴원하기 전에 오시려나.
그때, 결혼도 먼저 하고 출산도 먼저 한 여동생이 말했다. " 언니, 안 섭섭하나? 나라면 너무 섭섭할 거 같다."
그때부터였다. 섭섭 병이 생겼다. 남편 보기가 민망했다. 내가 사랑받지 못하는 딸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것 같았다. 시부모님이 아실까 봐 불안했다. 딸 출산에도 안 온 사돈이라고 욕할까 봐. 여동생 출산할 때는, 나도 엄마도 진통하는 순간부터 함께 했는데 나한테는 왜 오지 않나. 외갓집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데, 나를 보고 가도 될 터인데, 왜 첫 출산한 딸을 보지도 않고 가버렸을까. 왜 저렇게 무심한가.
몸은 만신창이에, 첫 애는 신생아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우리 아기가 잘못되면 어쩌나 눈물만 났다. 불안해하던 중 여동생의 한마디는 둑이 무너지듯 속상한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결국 부모님은 병원에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