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는 농촌 마을에서 살았다. 온종일 흙을 만지며 땅따먹기, 사방치기, 비석치기, 여의봉놀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하교 후부터 저녁 먹을 때까지 놀았다. 손톱 밑은 새까만 때가 가득하고, 손등은 터서 붉고 거칠거칠했다.
초등학교 6학년, 대구 학교로 전학을 갈 때까지 문제집 한 번을 푼 적이 없었으니.. 지나고 보니 감사하다. 하지만 중학교 때 알파벳 abcd도 몰라서 고생한 건 안 비밀이다.
우린 여름이면 가까운 곳으로 피서를 떠났다. 농사짓는 아빠에겐, 이동수단으로 오타바이 한 대밖에 없었다. 3박 4일 피서를 떠나기 위해 다섯 식구 짐은 굉장히 많았다. 오토바이 한 대론 어림없는 일이다.
그때마다 등장한 건 아빠의 경운기. 경운기에 짐을 가득 싣고 여행을 떠났다. 부끄러운 마음은 없었다. 경운기에 짐을 싣고 피서를 떠나는 사람들은 우리밖에 없을 거라는 자부심마저 들었다.
피서지에 도착하면 대부분 텐트를 쳤지만 우리는 모기장을 펼쳤다. 텐트가 없기 때문이다. 나뭇가지에 모기장을 걸쳐야 했기에 자연이 우리에게 그늘을 제공해 줬다.
밤에 덮을 이불도, 아침까지 덮었던 이불을 그대로 싸서 들고 갔다. 침낭이 있다는 건, 대학교 때 선교여행을 가면서 알게 되었으니, 나는 진짜 촌년 중에 독보적 촌년이다.
드디어 우리도 텐트를 샀다. 강가에 짐을 펼칠 수 있었지만 평평한 바닥이 어디 있나. 자연이 우리에게 돌베게도 제공해 줬다. 딸 둘 아들 하나, 우리 삼 남매는 깔깔대며 살갗이 벗겨지도록 놀았다.
엄마는 마치 집안 살림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짐을 풀었다. 세끼 밥뿐만 아니라 간식에, 아빠 안주까지 척척 만들어내며 낮이면 낮, 밤이면 밤, 함께 물놀이를 하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생일날 미역국은 먹었지만 선물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매년 어린이날에는, 항상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놀아주셨던 부모님.
오늘은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을 꺼내 본다. 글이 아니었다면 좋은 기억들도 그저 묻어두기만 했을 텐데. 오늘은 그 기억들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액자에 넣어 마음속에 걸어본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 애를 많이 썼구나. 그 뜨거운 여름. 1번도 아니고 2~3번을 놀아주기 위해 그 많은 짐들을 싸고 풀고를 반복했구나. 오늘은 추억이 기쁨이 되어 내 마음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