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늘이구나!’
손꼽아 기다리던 문 소장의 강연회 날이 밝았다. 30분 전에 도착했는데도 강연장은 빈틈없이 꽉 차 있었다. 강연회의 주제는 ‘중국어 꽃나무 키우기’였다. 무대가 밝아지고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문 소장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따지아 하오! 문정아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중국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누구보다도 더 뜨거운 분들이실 겁니다. 그러니 일부러 먼 곳까지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겠죠. 최근 한 젊은 친구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하면 ‘중국어 꽃길’을 걸을 수 있나요?”
홍 대리의 몸이 저절로 앞으로 기울었다. 집중할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이런 느낌을 받은 사람이 홍 대리 혼자만은 아닌지 좌중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가벼운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진지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그 친구의 질문은 강연회를 준비하는 내내 제게 화두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주제도 ‘중국어 꽃나무 키우기’라고 정했죠. 다소 감성적인 제목이라 고민을 좀 했습니다만 함께 생각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홍 대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그럼 꽃나무 한 그루를 상상해볼까요? 커다란 벚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씨앗이었습니다. 그 씨앗이 땅에 떨어져 발아가 되고 뿌리가 자랍니다.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줄기가 땅 위로 솟구쳤겠죠. 줄기는 기둥처럼 튼튼해지고 작은 가지들이 뻗어 나옵니다. 가지에서는 또 작은 가지가 나오고 작은 잎도 태어나지요. 이후 꽃망울이 맺히고 어느 날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햇빛과 바람, 비가 벚나무 옆에 머물렀다 지나갑니다. 활짝 핀 꽃은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미소 짓게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죠. 제 이야기의 핵심도 바로 이것입니다. 중국어를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만 같은 시간을 보내도 시간의 질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는 10년을 공부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반면, 누군가는 6개월 만에 일상적인 대화를 하기도 하죠.”
문 소장은 잠시 말을 끊고 청중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맨 앞에 앉은 젊은 여성에게 말을 건넸다.
“‘중국어’ 하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발음이 어려워요.”
“네, 처음에는 어렵다고 느껴지지요. 저도 그랬답니다.”
문 소장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자신도 그러했다며 공감했다. 문 소장은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그들의 입장에서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처럼 잘하게 되셨나요?”
“중국에 유학을 갔으니 중국어를 잘하고 싶다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공부를 하다 보니 뿌리만 제대로 내리면 중국어가 의외로 쉽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특히 우리 같은 한국인에게는 더더욱요.”
* * *
“제가 왜 중국어가 쉽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릴게요.”
문 소장이 칠판에 적은 문장은 세 가지였다.
첫째, 중국어와 한국어에는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많다.
둘째, 중국어는 매우 단순하다.
셋째, 중국은 우리나라와 같은 한자 문화권이다.
“우선 첫 번째부터 말해볼까요? 중국어와 한국어에는 발음이 비슷한 단어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한국’은 중국어로 ‘한궈韩国’라고 하고요. ‘양’은 중국어로 ‘양羊’입니다. 거의 비슷하죠? 커피 많이 드시죠? 커피가 중국어로 뭘까요?”
“카페이咖啡!”
“맞습니다. 이런 단어는 우리말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한 번만 들어도 금방 익힙니다. 두 번째, 중국어는 단순하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표의문자인 중국어는 표음문자인 우리말이나 영어보다 단어나 문장의 길이가 짧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학교에 간다’를 우리말로 하면 일곱 글자인데, 영어로는 ‘I’m going to school’이니까 열다섯 글자였다. 그런데 중국어로 하면 ‘我去学校’로 네 글자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어법이 복잡하지 않아서 단어 배열만 잘하면 바로 문장을 만들 수 있고, 영어와 달리 단어 자체의 형태도 변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중국은 우리와 같은 한자 문화권 나라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혹시 아시나요?”
한자 문화권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평소에 실감하지 않아서였을까. 우리말에 한자가 많긴 했지만 한글 교육을 받고 자란 홍 대리 역시 한자를 잘 몰랐다.
“우리말의 60퍼센트 이상이 한자어예요. 그래서 중국어를 공부하다 보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 때가 있죠.”
잠시 후 문 소장은 옆에 앉은 사람과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도록 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인사를 나누는 상황극이 연출되자 순식간에 강연장은 중국어 인사말과 웃음으로 시끌벅적해졌다.
“니 하오你好(안녕하세요).”
“워 슬 원징워我是文井我(저는 문정아입니다). 칭원 닌 슬请问您是(실례지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헌 까오씽 런슬 닌很高兴认识您(만나서 반가워요).”
“중국어가 되네요, 정말!”
홍 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외쳤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문 소장에게 다가갔다. 이미 홍 대리보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문 소장과 사진을 찍겠다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드디어 홍 대리의 차례가 왔다. 홍 대리는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펜과 종이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힘차게 외쳤다.
“소장님, 저의 사부님이 되어주십시오!”
* * *
토요일 아침,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문 소장을 만나기로 한 카페에 가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사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어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문 소장은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고, 그 후 홍 대리는 간곡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메일을 보냈다. 절박한 마음이 통했는지 오늘 만나자는 답장이 왔다.
잠시 후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홍 대리는 “카페이!”라고 말하며 한 모금 마셨다. 강연회 때 배운 말은 신기하게도 입에서 곧바로 튀어나왔다. 중국어를 씹어 먹겠다며 야심차게 빽빽이를 썼던 단어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눈으로 보거나 쓰면서 외우지 말고, 입으로 말하면서 따라 하라고 했지.’
“홍 대리님, 안녕하세요.”
“아, 문 소장님!”
홍 대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문 소장이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중국어 공부는 잘되고 있나요?”
“네! 아니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마음만 앞서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특히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이 어떤 건가요?”
“책을 보거나 인터넷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아주 조금 독학한 수준이라 뭐가 어려운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발음’인 것 같습니다. o 발음과 e 발음이 단순히 ‘오’나 ‘어’가 아니더라고요. 앞에 조금 길게 ‘으-’가 붙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들어도 똑같이 따라 하기가 어렵습니다.”
홍 대리는 자신이 진짜 문 소장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오늘 이 자리에서 판가름 난다고 생각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고, 한 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느슨하게 풀렸던 몸에 긴장이 딱 생기면서 허리가 저절로 꼿꼿해졌다.
“메일에도 썼지만 저희 회사가 곧 중국 진출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을 굉장히 좋아해요. 앞으로 중국 무역에 대한 공부도 더 깊이 하고 싶고요. 그래서 하루빨리 중국어를 익히고 싶습니다. 소장님께서도 중국어는 말로 시작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발음을 좀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음, 우선 자신의 목소리부터 잘 들어보세요.”
“제 목소리를요?”
“네, 혹시 중국어를 말할 때 자신이 없어서 작게 소리를 내거나 웅얼거리지는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니 중국인과 똑같이 말할 수는 없겠죠. 외국어를 배우는 이상 그건 영어든 프랑스어든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래서 최대한 가깝게 따라 하는 건데, 입을 크게 벌리고 톤을 약간 높게 잡는 편이 좋아요. 아기가 엄마의 입을 보면서 따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아기가 엄마를 따라 하듯이…….’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아요. 현지에서 쓰이는 중국어는 한국 교재에 나와 있는 말과 다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중국어를 배울 때에도 죽어 있는 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을 배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언어라…… 꼭 사람 같네요.”
“맞아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귀려면 직접 만나보고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 과정에서 몰랐던 면도 알게 되고,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잘 몰랐다는 점도 깨닫죠. ‘이 사람에게 이런 점이 있었구나!’라고 감탄을 하기도 하고 조금은 실망을 하기도 하잖아요. 중국어와 친해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해요.”
‘중국어와 친해진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아기가 엄마의 말에 익숙해지고 또 말을 따라 하다가 자신의 말을 하게 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하듯이, 자신 또한 중국어와 친해지고 익숙하게 말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