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박람회 날이 다가왔다. 며칠 밤을 새면서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만,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박람회장에 설치된 부스만 해도 1500개가 넘었다. 걸어도 걸어도 부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쉬는 시간도 없이 부스에서 바이어들을 응대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단 전체적으로는 홍보에 성공한 듯 보이긴 했지만 비즈니스 성과로 이어졌다고 하기엔 시기상조였다. 안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선 박 팀장이 사전 예약을 하고 온 중국인 바이어들에게 부지런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홍 대리는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다음 예약된 중국인 바이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도착할지 몰라 밖을 기웃거리는데, 20대 중국인 여성이 들어왔다. 마네킹에 입힌 치마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멍멍따萌萌哒(귀엽당)!”
어디서 들어본 단어 같았는데 뜻이 생각나지 않았다. 얼른 바이두를 열어 검색해보니, ‘귀엽다’라는 뜻의 신조어였다. 우리도 자주 쓰는 ‘귀엽당’ ‘예쁘당’이라는 의미였다. 부스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고객에게 얼른 다가갔다. 미리 중국어로 준비해둔 옷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그러더니 지금 판매하고 있는 옷이냐고 물었다.
“하이 부 슬, 부꿔 츨자오 훼이 샹 궈 슬창, 따오슬 이띵 야오 마이还不是, 不过迟早会上中国市场, 到时一定要买(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만간 중국에서 보게 될 테니, 그때 꼭 구입해주세요).”
“와! 슬 챠오지 씬콴 바? 짜이 궈 넝 마이더따오 찌우 하오 러哇! 是超级新款吧? 在中国能买得到就好了(와! 완전 신상이네요? 중국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흐뭇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며 홍 대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2030 세대들이 일상에서 자주 쓰는 유행어를 따로 정리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겠군.’
패션에도 트렌드가 있는 것처럼 언어에도 트렌드가 있었다. 유행어와 신조어를 알아두면 업무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시간에 딱 맞춰 바이어가 도착했다. 예상보다 큰 박람회 규모에 놀란 듯해 보였다. 미팅 테이블에는 홍 대리와 박 팀장이 앉았다. 중국에서부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놓은지라 미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미팅이 끝나고 바이어들과 악수를 나눈 뒤 중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했다.
바이어들이 떠난 후 부스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다음 달에 중국에서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정된 것이었다.
* * *
박람회가 끝나자마자 한 달 후 있을 중국 출장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홍 대리는 좀 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출장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지 시장 조사는 제안서와 보고서를 쓸 때 이미 한차례 끝낸 상황이었지만, 중국의 속살까지 깊이 들어가 현재 중국 2030 세대들이 어떤 트렌드를 원하고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기 바라는지 알고 싶었다.
“중국의 젊은 친구들도 자주 쓰는 말이 있겠죠?”
“물론이죠.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따哒’라는 말이 있는데, 본래 의미는 소리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에요. 말발굽 소리 ‘다그닥 다그닥’이나 기관총 소리인 ‘다다다다’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죠. 그러다 최근 인터넷에서 단어 끝에 붙여 쓰면서 유행어를 만들어냈어요. 홍 대리님이 들었던 ‘멍멍따’도 그런 말 중 하나죠. ‘귀엽다’라는 의미의 ‘커아이可爱’보다 뭔가 더 ‘우쭈쭈~’ 하는 느낌이랄까. 혹은 ‘귀엽당’ ‘귀요미’가 지닌 뉘앙스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거예요. ‘머머따么么哒’는 ‘뽀뽀 쪽’이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애교를 부릴 때 쓰는 말이죠. ‘빵빵따棒棒哒’는 ‘쩐다’ ‘대박’ ‘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요.”
“‘빵빵따’는 채팅을 할 때 써먹어봐야겠어요. 그럼 신조어는 어떤 게 있나요?”
“띠토우주低头族(수그리족)가 있으려나? ‘수그리족’이라는 뜻인데, 그건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띠토우주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휴대폰만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어? 그건 저도 해당되는데요?”
“저도 가끔은 그래요.”
문 소장이 공감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이타오주海淘族(해외직구족)’라는 말도 있었다.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중국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海’는 ‘바다’, ‘淘’는 ‘소비하다’, ‘族’은 ‘집단’을 의미하는데, 풀이해보면 ‘바다 건너의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뭔가 우리랑 비슷하네요.”
“그렇죠? 현대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비슷한 부분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재미있는 신조어 중에 ‘밍밍삥明明病(미루기 병)’이라는 말도 있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미루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공부는 내일부터! 운동은 내일부터! 이런 뜻이네요?”
“맞아요. 저도 다이어트만 생각하면 ‘밍밍삥’에 걸리곤 하죠.”
“다이어트는 언제나 내일부터죠! 그건 오늘 하는 게 아니에요.”
홍 대리의 넉살에 문 소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밖에도 한국에서 쓰기 시작해 중국으로 넘어간 신조어도 있었다. ‘뉘얼 샤꽈女儿傻瓜(딸 바보)’ ‘얼즈 샤꽈儿子傻瓜(아들 바보)’ ‘까오푸슈아이高富帅(엄친아)’ ‘바이푸메이白富美(엄친딸)’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뚜어쇼우주剁手族(쇼핑중독자)’라는 말은 ‘자르다’라는 뜻의 ‘剁’와 ‘손’이라는 뜻의 ‘手’가 합쳐져 생긴 말인데, 쇼핑에 중독되어 손을 잘라야 할 정도라니 조금 무서워지기도 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푸얼따이富二代(금수저)’와 ‘치웅얼따이穷二代(흙수저)’라는 말도 유행이라고 했다.
“왜 이런 말들이 유행하는 걸까요?”
“현실을 반영한 모습이 아닐까요?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은 엄친아, 엄친딸을 길러냈을 거고,
금수저나 흙수저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죠. 말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움직이는 변화체잖아요. 젊은 세대가 자주 쓰는 말을 잘 살펴보면 당시 시대상과 문화를 거울처럼 볼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중국어를 공부하는 데에만 열중했지, 중국의 문화나 중국인들의 삶이 어떤지 알고자 하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중국에서 의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게 당연한데도 ‘중국어만 배우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만 배운다고 해서 중국어를 완벽히 마스터했다고 할 수는 없는 거네요.”
“그렇죠. 말만 따라 하면 앵무새에 불과해요.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운다는 건 그들의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더욱 중국과 중국인들의 삶 속으로 깊이 들어가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어요. 앞으로의 중국어 실력은 홍 대리님이 얼마나 그들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