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정신과 전문의의 디지털 디톡스 실험
게임을 오래 하거나, 유튜브 쇼츠를 오래 보고 나면
아이가 유독 짜증을 많이 내고, 급해지며, 속도감이 느리고 지루한 일에 착수하지 못하는 것같아 보인 적 있나요?
ADHD 아이를 키우며 게임과 유튜브가 얼마나 해로울지 짐작하지만 허락하지 않을수도 없어 늘 고민이었어요.
이런 제게 도움을 준 강의가 있었어요.
<ADHD Parenting Summit>에서 열린 강연
<Raising ADHD kids in a Tech-Driven World>입니다.
미디어가 ADHD 아이의 뇌에 미치는 영향과 조절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강연의 핵심 내용 2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유튜브나 게임 등 미디어가 아이의 전두엽을 약화시키는 방식
-뇌를 리셋하는 미디어 끊기 훈련(Cold-Turkey)의 효과
강연자는 Dr. Victoria Dunckley로 미국 LA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신과 전문의입니다. 특히 디지털 디톡스와 스크린타임이 뇌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활발히 글을 쓰고 강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쓴 책 <Reset your child’s brain>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11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던클리 박사는 진료실에서 아이들을 만나 상담하며 미디어가 아이들의 뇌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 그로 인해 행동방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걸 체감했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책을 쓰게 된 던클리 박사는 스크린 시간을 줄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다면 아이들은 훨씬 더 나아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집중력, 성적, 학습 능력, 심지어 친절함까지도 좋아질 거라고 단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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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클리 박사는 게임, 영상, 심지어 교육용 콘텐츠 등 어떤 형태로든 스크린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아이들이 ‘전자스크린 증후군(ESS)’을 겪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전자스크린 증후군(ESS)이란?***
ESS는 지속적 스크린 사용으로 뇌의 도파민 보상회로가 과도하게 활성화된 결과 과잉 자극에 둔감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 뇌에는 위협을 감지했을 때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생존 시스템 ‘fight or flight(싸울까 도망갈까)’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원시적 뇌기능인데, 스크린 시청 및 게임이 이 원시적 뇌 기능을 자극합니다. 미디어 사용 시간이 길어지면 뇌의 보상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려서 늘 ‘호랑이(=위협)’를 만나는 긴장상태 즉, 만성적 과잉 각성 상태(fight mode)가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교감 신경이 활성화 돼 이성과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 기능이 저하됩니다. ‘호랑이’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뇌는 ‘호랑이가 나타났다 긴장해!’라고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겁니다. 즉, 있지도 않은 위협 앞에서 이성적 사고는 마비되고 감정과 행동이 먼저 튀어나오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아이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짜증과 분노 폭발
-충동적 행동
-극심한 감정 기복
-수면 장애
-집중력 저하
ADHD 아이들에게는 이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ADHD 아이들은 원래도 에너지 조절이 어려운데, 여기에 이런 스크린의 영향까지 더해지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집중력, 충동 조절,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저하되면서 더 충동적이고, 더 과격해지고, 덜 공감하게 되며, 미래 예측 능력도 떨어집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쉬려고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게 되면 정작 쉬지도 못하고 뇌는 쉰 것처럼 속는다는 점입니다.
머리를 비우고 쉬고 싶어 유튜브 앱이나 게임을 켜게 되지만 실제 뇌는 쉬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언제 올지 모를 존재가 없는 ‘호랑이’의 공격에 대비하며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스크린 시간을 줄이는 건 단순한 디지털 중독 방지를 넘어 뇌를 ‘전투 모드’에서 ‘휴식 모두’로 회복시키는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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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꾸 미디어를 보고 게임을 하려는 우리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크린 시간을 조금씩 줄이거나 약속된 시간만 하도록 절제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던클리 박사는 이 방식에 회의적입니다. 진료실에서 미디어 시간을 점진적으로 줄이거나 하루 할당 시간을 정해 미디어를 조절하는 연습을 해봤지만 가장 효과가 있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고 해요. 시간을 줄이는 방식으로는 뇌가 회복되기까지 절대적 시간이 부족했다고 해요.
던클리 박사가 주장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최소 3~4주 동안 모든 스크린 자극(게임, 영상, 교육용 앱 등)을 완전히 차단하는 ‘콜드 터키(Cold Turkey)’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경계가 회복하고 리셋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과연 가능한 방식인가? 의문이 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저 또한 처음에는 너무 과격한 주장 아닌가 싶었어요.
그런데 바꿔 생각해 보면 던클리 박사가 3~4주간의 콜드 터키 방식을 제안할 만큼 스크린타임이 뇌를 많이 바꿔놓고 있고 점진적 방식으로는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경고를 하는 걸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던클리 박사는 상담실에서 콜드 터키 방식으로 개선된 사례도 알려주는데요.
수없이 많은 개선 사례가 있다며 정리정돈을 잘하게 되고 차분해지며 집중력이 향상된 사례. 더해서 감정폭발 감소, 틱 감소, 학교 성적 상승(F에서 A로, C에서 A로 상승 등), 독서를 시작한 사례 등을 제시했습니다.
미디어 디톡스를 하게 되면 일단 느리고 저자극인 현실의 템포에 맞추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뇌는 일정기간 환경만 바꿔주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콜드터키 기간 후에는 바로 스크린을 다시 시작하지 말고, 아이와 스크린을 언제 어떻게 다시 도입할지 결정하는 게 좋다고 해요.
아이가 어릴 때부터 미디어가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가르치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초등 입학 전 유치원에서부터 알려줘야 한다고요.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감정과 사고를 어떻게 조절하는지 알려주고 "스크린은 재미있지만, 뇌에는 항상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실생활 예시로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해요. 예를 들어 게임을 너무 오래 하고 감정조절이 안 되는 친구의 사례를 들려준다든지, 아이가 게임을 많이 한 날 유독 감정조절이 어려웠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죠.
던클리 박사는 다른 가족과 플레이 데이트를 잡거나 가족만의 놀이 시간을 마련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고 제안해요.
가족끼리 모여 앉아서 뭐 할지 브레인스토밍 해보고 퍼즐이든 축구든 가족이 모여서 함께 할 것을 상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하죠.
아무래도
중독에 취약하고 충동적인 ADHD 아이를 키우다 보니 미디어 사용에 예민하게 됩니다.
잔소리도 많이 하고 있고
시간을 정해 절제하는 연습도 하고 있어요.
미디어를 많이 보게 되고 게임을 많이 하게 되면 아이가 여느 때보다 충동적이에요. 짜증도 많고, 공부나 정리 같은 일상과제 앞에서 쉽게 무너집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아이가 자신의 미디어 이용 특징을 인식하게 하고
스스로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아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궁극적 변화는 어려워요.
지구에서 발붙이고 사는 재미를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희 가족은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거나 배드민턴 치는 걸 좋아해요.
여기에 더해서 던클리 박사님이 말해준 대로 다른 집과 플레이 데이트를 하거나 함께 캠핑을 가는 시간을 마련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번 다짐하지만 뜻대로 안 되는 날도 분명 있어요.
그런 날은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또 노력하려고 해요.
작은 노력이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미래가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완벽하진 않아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다시 시작하는 마음이겠죠.
포기하지 않는 작은 시도가 결국 큰 변화를 만들 거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