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풍경
6년 전, 첫 번째 발리 여행에서 무리한 동선 때문에 길거리에서 허비한 시간이 많았기에 이의 아쉬움을 만회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발리의 대표적인 관광지들을 두루두루 다녀보고 싶었다.
(여기에서 함정은 바로 ‘두루두루’. 발리의 면적이 줄어든 것도 아니고, 교통 체증이 개선된 것도 아닌데 두루두루 다녀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미 앞날은 예정되어 있었다…)
해외여행을 다닐 때면 여행지의 대표적인 사원과 박물관 등을 즐겨 다닌다. 이는 국내 여행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 유명한 장소들은 그에 준하는 이유가 대부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오래된 사원이 품은 안온함이 참 좋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음에도 그렇다. 또한 고찰의 경우 건축학적 미술학적 가치도 내포하기 때문에 더불어 배움도 얻게 된다. 더욱이 수련한 자연과 어우러져 자리한 사찰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발리에서는 울루와뜨 사원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울루와뜨 사원은 발리의 울루와뜨 지역에 있는 힌두교사원으로, 깎아지른 절벽에 몰아치는 파도의 기운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장엄한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앞에서는 숙연해진다.
교통 체증을 뚫고 도착해 습한 더위와 마주해야 했지만 경치를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역시 유명 사찰답게 전 세계에서 모여들었을 법한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에 못지않게 근방에서 수많은 원숭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원숭이들은 동족(?)을 만난 탓인지 거리낌 없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선글라스와 모자를 빼앗아 착용하는 친근함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문명과 속세에 찌들 대로 찌든 나는 영화 <혹성탈출>을 떠올리며 원숭이들을 피해 다니기 바빴다. (심지어 <혹성탈출>은 인간의 오만함에 경종을 울리는 영화인데도 나는 이족에 대한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사실 수많은 전 세계 여행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울루와뜨 사원을 방문하기 위함이 전부는 아니다. 바로 발리의 대표적인 공연인 케짝댄스가 울루와뜨의 웅장한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의 내용 일부를 토대로 한 케짝댄스는 불, 인도네시아 전통악기 가믈란과 함께 펼쳐지는 화려한 춤이다. 사실 춤의 내용은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울루와뜨 바다를 배경으로 한 멋진 공연장에서 전 세계 여행객들과 함께 관람을 한다는 행위 자체만으로 무척 특별했다. 무엇보다도 깊어지는 노을과 함께 공연이 펼쳐졌기 때문에 더욱 인상 깊었다.
공연이 끝나고는 쏟아지는 관람객들과 함께 입구까지 걸어 나와 무사히 택시를 잡아탔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숙소 근처 레스토랑에 무작정 들어갔는데, 무척 만족스러웠다. 일행과 함께 정갈한 음식과 더없이 친절한 서비스에 감탄하며 레스토랑을 나왔다. 계획에 없었던 묘미를 맛보는 순간, 여행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다음 날은 조금 바빴다. 발리 동부 지역을 투어 하기로 해서 아침 일찍부터 바삐 채비해야 했다. 지도앱 상에서는 2시간 남짓한 거리로 측정되지만 발리의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은 항상 늘어졌다. 미리 프라이빗 투어를 신청했고, 한국어를 구사하실 수 있는 기사님이 가이드를 해주셨다. 제법 유창한 실력이셔서 혹시 한국에서 거주하셨는지 문의했는데 그건 아니고 한국어 학원을 다니셨단다. 외국인이 배우기 어려운 언어로 꼽히는 한국어를 그렇게까지 배우셨다니 왠지 어깨가 조금 무거워졌다. 제법 장거리 운전이었지만 기사님의 안정적인 드라이빙 실력 때문에 밀린 잠을 보충하며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사실 다소 먼 동부를 프라이빗 투어까지 신청해서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는 온라인상에서 떠돌던 인생샷들 때문이었다. 높은 산악 지대의 어느 사진 스폿에서 더 멀리, 더 깊이 발리의 자연을 느껴보며 나 역시 인생샷을 건지고 싶었다. 바로 이런 느낌 말이다.
하지만 원래 그런 법이다. 안전벨트도 없는 지프차의 짐칸에 쪼그리고 앉아 울퉁불퉁 산길을 조마조마하게 올라갔는데 자욱한 연기들이 주변에 꽉 차있는 것 같더니만.
결과적으로 탁 트인 시야 대신 안갯속의 풍경만 잔뜩 구경하고 돌아왔다. 희뿌연 하고 흐리멍덩한 인생과 닮았다고 굳이 자조하며 위안을 삼았지만 사실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았다. 원래 안개는 내 친구이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우붓으로 향하기에! 발리를 다시 오기로 결심한 데에는 우붓의 풍경을 제대로 눈에 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지난 여행에 잠깐 머물렀던 우붓과 좀 더 제대로 친해져보고 싶은 생각에, 남은 일정은 모두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우붓은 발리 중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바다에 맞닿지 않은 대신 계곡과 계단식 논 등이 유명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열대우림의 끝 간 데 없는 녹색을 실컷 보고 싶었기 때문에 우붓을 재방문하기로 했다. 또한 발리의 전통 예술과 각종 수공예품들이 발달해 있다는 우붓에서 ‘발리적인’ 무언가를 느껴보고 싶었다.
자, 다시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