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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이었어!

캠핑카 세계 여행 에세이 77 - 그리스 고대 올림픽 유적지

by 류광민

반가운 벗들

파트라스에서 고대 올림픽 유적지까지 가는 길은 산길의 연속이었다. 가는 산길에는 12월인데도 단풍이 물든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다행히도 해가 지기 전에 유적지 마을 앞에 있는 공용 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했다. 아톰보다 먼 저 온 2대의 캠핑카가 있다. 이런 곳에서 캠핑카를 만나면 벗을 만난 듯 기쁜 마음이 든다.

한대는 버스를 개조한 캠핑카이고 한대는 아톰과 비슷한 덩치이다. 버스 캠핑카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함께 여행하는 부부의 캠핑카였다. 한국에서 왔다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질 것이다.

노란 단풍이 물든 산 길과 가끔 지나가는 양떼들을 만나는 길을 따라 고대올림픽 유적지에 있는 공용주차장에 도착했다. 캠핑카가 여러대가 있으면 대부분 안전한 곳이다.

계속 뒤에 있는 아내!

다음 날 아침에 고대 올림픽 유적지로 간다. 먼저 박물관부터 들어간다. 그렇게 크지 않은 박물관이다. 대충 둘러보려면 30분이며 충분할 수도 있다. 그런 박물관에서 아내는 오전 시간을 다 썼다. 아내는 설명문 하나하나를 너무 꼼꼼하게 읽고 다닌다.

고대올림픽 유적지 모형부터 출토된 다양한 토기와 조각과 송기정 옹이 받았던 투구와 유사한 모습의 투구들

무엇을 읽었을까? 나는 앞에 가는데 아내는 자꾸 뒤에 있다.

그런 일이 그리스 여행 내내 이어졌다. 유적지 설명문은 평상시에 사용하는 용어가 아닌 보다 전문적인 용어들이 많다. 때문에 해석에 어려운 부분이 많게 되는데 아내는 모르는 단어를 모두 찾아가며 읽고 있다. 책상에 앉아서 읽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허리가 아파온다. 가능한 나도 호흡을 맞추기 위해 다리를 넓게 벌린 자세로 설명문을 읽어보지만 큰 효과는 없다.

그런데 아내는 아직도 열심히 공부 중이다. 무어라고 할 수도 없다. 대충 읽으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중요한 문장 정도 이해하고 너무 궁금하면 나중에 사진으로 확인하면 될 텐데 말이다. 결국 나는 의자를 찾아 앉아서 아내를 기다린다. 그리고 벌써 점심시간이다. 우리보다 늦게 들어온 관광객들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고대 올림픽 유적지에 대한 잘못된 생각

박물관 정문을 나서 큰길을 건너가면 고대 올림픽 유적지가 있다. 나에게 고대 올림픽 유적지에 대한 정보는 주로 고대 올림픽 경기장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고대 올림픽 유적지는 운동경기 시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곳이리라 생각했다. 유적지에 들어가면서 이런 나의 이해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올림픽 경기가 열렸던 경기장과 훈련장들은 제우스 신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서 많이 보았던 올림픽 경기장 건물은 유적지의 중심에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외진 곳에 있다. 어느 장소나 중심부에 있는 시설이 그 장소의 성격을 규정한다. 유적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다. 엄청난 큰 돌로 세워진 기둥은 지금까지 보아온 신전 어느 것보다 크다. 신전 기둥에서 굴러 떨어졌을 동그란 돌들의 크기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많은 건물들도 상당 수가 신전이다. 신전을 중심으로 체육훈련장이나 경기장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니까 고대 올림픽 유적지는 체육시설이 아니라 전체가 신전이었던 것이고 체육 시설은 신전의 부속 시설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전에서 열렸던 고대 올림픽 운동 경기는 신을 위한 신성한 축제였을 것이다.

제우스 신전의 주춧돌의 크기를 보면 제우스 신전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이 축제에서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은 모두 옷을 입지 않고 출전했다. 선수들은 신의 몸과 가장 가까운 이상적인 몸을 만들고 그 몸을 기꺼이 신에게 보여드리고 신을 위한 축제에 참가한 것이다.

신을 닮은 인간. 그렇지만 '나약한 인간이 얼마나 신의 힘에 기대어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으면 이렇게 큰 신전을 지었고 그 신을 위해 승리의 축제를 벌렸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현대 문명으로도 들어 올리기 힘든 돌덩어리들을 기꺼이 다듬고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바로 거기에 있지는 않았을까! 그 당시에 가장 위대한 신인 제우스 신전에 바치는 인간의 제물도 가장 크고 위대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대했던 신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오늘 나는 이 유적지에서 인류가 만들어 온 역사가 어쩌면 나약한 인간이 이상을 향한 욕망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산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스 고대 올림픽 유적지 전체가 최고의 신인 제우스 신전으로 보이면서 내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다.

아직 해가 하늘에 높이 떠있고 3시가 안되었는데 어디에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난다. 관람객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다들 나가는 분위기.

'이 분위기는 뭐지'

관리인 아저씨가 구석진 곳을 다니면서 호루라기를 불고 있다. 이제 나가라는 것 같다. 아직 해가 밝은데 문을 닫는 거지. 그렇게 쫓기듯이 나와야 했다. 그러나 입구에서 표 관리하시는 아줌마가 밝은 미소를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참고로 겨울철에 그리스 유적지는 일찍 문을 닫는다. 대신에 입장요금은 반값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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