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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야 Jul 09. 2019

괜찮은 척 해도 괜찮지 않은 것






아마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면 놀만한 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학기 중이라면 같은 반 친구들과 만화책을 빌려보거나 친구 집에 가서 빌린 비디오를 보곤 했는데 방학이 되면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먼 곳으로 휴가를 가는 친구들이 많았고(그때는 여행이라는 단어를 흔하게 쓰지 않았던 것 같다), 학원 무리와 어울리는 친구들도 많았다. 


나는 가족들과 휴가를 가지도 친구들과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혼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끔은 구립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었다. 지금의 걸음이라면 20분 정도면 갔을 텐데 그때는 1시간 가까이 걸어야만 도서관에 갈 수 있었던 듯하다. 도서관에 오고 가는 길에 갑자기 배가 아파오면 사색이 되어 뛰듯이 집으로,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도서관에도 가지 않을 때면 TV를 봤는데 할머니가 봐야 하는 프로그램이 꽤 많았던 터라 나에겐 큰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멍하니 방 안에 누워 있었다. 


내 방이 없었기에 주로 오빠들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학교 뒷문에 있는 문방구에서 2천 원을 주고 산 미니 보드게임을 가지고 혼자 놀곤 했다. 혼자서 4인용 부루마블을 하며 쉴 새 없이 주사위를 굴리기도 했고, 눈을 감은 상태에서 손에 쥐어지는 종이상자 하나에 보물을 넣어두곤 도둑잡기 게임을 하기도 했다. 오래전에 누군가가 사줬던 만화책을 수십 번 반복해 읽었고 혼자서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내 키만큼 큰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공주놀이를 한 적도 많았다. 그 와중에도 방학숙제는 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으로 읽었던 소설 <아버지>



아무리 열심히 놀아도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시선이 책장으로 이어졌다. 4단짜리 책장에는 언제나 같은 책들이 같은 위치에 꽂혀 있었다. 오빠들은 책을 잘 안 보는 것 같았다. 누가 저 많은 책을 가져왔을까, 멋진 막내 고모일까 다리를 떨며 판타지 소설을 읽은 큰 오빠일까 아니면 날라리 같은 작은 오빠일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누구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머리 아픈 고민은 금세 접었고 그중 눈에 띄는 몇 권을 꺼내 읽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중 한 권은 <아버지>라는 소설이었는데(김정현 저) 다른 책들과 다르게 ‘-읍니다’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었다. 대개 ‘-했다’는 식으로 문장이 짧게 끊어져서 글자를 덜 읽어도 되는 편리함이 있었다. 


나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었다. 동화나 만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빼곡한 글자만으로 이어진 두꺼운 책 한 권을 완벽히 읽은 첫 소설이었다. 


처음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유심히 들여다본 것은. 또 처음이었다. 나의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마음을 빼앗기고 눈물을 흘렸던 것도. 


책을 덮고 나는 또다시 방 한가운데에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 어쩌면 아빠가 내게 전하는 비밀 편지일지도 몰라!’


소설의 주인공 ‘정수’가 책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내 아빠의 별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나의 아빠가 가족들에게 전하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에게만 전하려고 이 책을 숨겨두고 의도적으로 내가 읽도록 마법을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아니라면 나만 빼고 모두가 아빠가 아픈 것을 알고 있으며 내게는 끝까지 비밀로 하려다가 내가 크면 그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글로 써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확신처럼 느껴졌다. <안네의 일기>처럼 이 소설 역시 아빠의 일기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확신에 빠졌다. 


그리고 그제야 아빠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소설은 우리 아빠의 이야기여야만 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서 가족과 한 걸음 더 멀어지려 한다. 매일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친구와 싸우고 이웃을 때리려고 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의 아빠도 그랬다. 그러니까 내 아빠가 종종 집에 들어오지 않거나 취해서 들어오는 것, 술에 취해 친구와 싸우고 이웃과 다투고 우리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때리는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되었다. 아빠는 큰 병에 걸린 것이다. 


‘바보냐. 소설처럼 아팠으면 벌써 이 세상에 없지!’

‘아니야, 기나긴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그걸 짧게 쓴 걸 수도 있지.’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불안한 삶에 우리도 늘 함께 흔들려야 했으니까. 나와 오빠들, 할머니는 아빠가 집에 없을 때 더 즐거웠다. 같이 모여 TV를 보고 과일을 먹으며 웃었다. 그러다가 아빠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졌다. 오빠는 자신들의 방으로, 나는 원래 있던 방 한 구석에 이불을 펴고 자는 척을 했다. 할머니는 술 취한 아빠를 달래 내 옆에 눕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아빠의 품에 안겨 자야 했고 할머니는 오빠들의 방으로 들어가셨다. 지독한 술 냄새에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면 나도 잠에 빠졌다. 가끔은 아빠가 잠들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할머니 품에 달려가 자기도 했다. 그 방은 좁았지만 아늑하고 포근했다.


우리들의 쇼가 통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엔 큰 사달이 났다. 지금이 몇 신데 벌써 잠을 자냐고 아빠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애새끼들이 어떻게 잠을 자냐고 자는 척하는 우리를 깨웠고 할머니에게 소리를 질렀다. 버릇없게 키운다면서. 아빠는 화를 내며 물건을 집어던졌고 나나 오빠들을 때렸다. 


나는 그런 아빠를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들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할머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소설은 반드시 내 아빠의 이야기여야만 했다. 그래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가 있을 테니까. 나는 어서 그 소설처럼 우리의 불행이 끝나기를 간절히 빌고, 신께 기도했다. 







처음이라는 말로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TV에서 반복적으로 들리는 대사가 하나 있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혹은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하는.


부모로서 부족한 자신에 대한 변명이거나 자식이 부모에게 건네는 주제넘은 위로의 말이지만 나는 나 역시 그 대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의 아빠도 태어나 처음 하는 ‘아빠’의 역할이 꽤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에 대한 연민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 감정은 그를 한 명의 사람으로 볼 때만 그렇다. 그를 나의 아빠로 보는 순간 연민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아빠는 롤모델이었다. 좋지 않은 쪽으로.

어떻게 살아도 저렇게만 살지 않으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돈이나 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존경이나 사랑도 없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도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지도, 그렇다고 좋은 친구들을 만든 것도 아니었다. 그늘 늘 술에 취해 담배 냄새에 찌들어 타인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절대 그렇게는 살지 않으리라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다짐했다. 


아빠에 대한 감정은 세월이 지나며 점점 더 응축되어 갔다. 그에 대한 애정은 사라졌고 분노와 원망, 멸시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나는 내 삶에서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그를 탓하게 되었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못했던 것은 무식하고 편협한 아빠가 술에 취해 나의 시간을 방해한 탓이었고, 내가 공부를 더 잘하지 못했던 것은 가난하고 이기적인 아빠가 나를 도와주지 않았던 탓이었다. 좋은 기업에 취직하지 못한 것은 내가 시간이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았던 부모의 옹졸한 태도 때문이었으며, 내가 서울에 홀로 살며 늦은 밤 내 두 손으로 내 목을 조르게 된 것은 부모가 내 비참한 삶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화살이 늘 아빠에게로 향했다. 꼭 자기만큼 못난 사람들과 어울려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몇 만 원씩 되는 술값을 척척 내는 아빠가 미치도록 싫었다. 당신이 조금만 더 가족을 위하고 우리를 배려했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찢어져 서로를 미워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늘 못난 아빠를 손가락질했다. 남들보다 못한 나의 상황을 저주하고 그 화살을 아빠에게 돌릴 때, 나는 괴로웠지만 참을 수 있었다. 내 탓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정말 그처럼 살고 싶진 않았다



수년 전 아빠에게 ‘복수’를 하고 나서 그 해 겨울 눈물의 편지를 써 보낸 까닭도 연민과 미안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서였다. 그 못난 사람의 행동을 내가 똑같이 따라 했다는 것에 수치심이 들었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왔는데, 결국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었다.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우리의 관계가 다시 회복된 후에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아빠의 감정선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 내가 지는 것이 결국 그를 이기는 것이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대척할 상황이 올 때마다 스스로를 누르고 또 눌렀다. 


내 아빠가 또다시 술에 취해 나의 마지막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던 때도, 그 마지막 엄마가 이젠 도저히 안 되겠다며 이혼이라는 말과 함께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때도 나는 아빠에게 화내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첫 직장을 그만두고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말을 했을 때 그가 내게 ‘나약해 빠졌다’며 위로 대신 손가락질을 가할 때도, 그리고, 그리고 아빠의 어떤 도움 없이 홀로 결혼식을 준비하며 한층 예민해져 있던 결혼식 전날, 내가 보인 서운한 태도에 기분이 상해 욕을 하고 술을 마시며 ‘내일 결혼식에 가지 않겠다’며 나를 미치게 만들던 그 날에도 나는 약 몇 알과 큰 숨으로 감정을 누르고 또 눌렀다. 저 사람에게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 감정을 보내고 나면 그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한다. 

“사랑하는 우리 딸”이라고. 

나는 그런 그에게 최선을 다해 웃음을 보였고 뒤돌아서는 눈을 감았다.







사랑하지만 사랑하기 싫은, 

미워하고 싶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아빠는 자주 내게 말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왜 자기한테 그렇게 잘해주냐고. 나는 답한다. 그럼 됐다고, 아빠가 기쁘면 됐다고, 그 행복한 감정으로 평소에도 즐겁게 살아가라고.



그리고 나는 그 밤이면 술을 마시며, 내 남편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나는 내 아빠를 한 명의 어른이자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좋아하고 불쌍히 여기며 잘해주고 싶다고. 그런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딸이기에 그를 좋아할 수만은 없다고.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자신에게 왜 잘해주냐고 물어볼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고. 그렇게 행복하다면서 왜 끝까지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지, 왜 주변 사람들과는 여전히 싸우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베풀 줄 모르냐고. 그가 세상 행복한 목소리로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왜 또 기분이 좋아지는데, 돌아서선 왜 또 빈정이 상하냐고. 그런 위선적인 내가 너무 싫고 이제 더는 그와 관계를 유지할 필요조차 없는데 나는 이제 어쩌면 좋으냐고. 






쓰고 또 써도 버리고 또 비워도

나를 좀먹는 그 감정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는 정말 내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Photo by Caroline Hernand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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