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고백
2013년의 기억은 서울도시철도 7호선 청담역사에서부터 시작된다. 2012년 8월, 대구에서 대학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회사들에 이력서를 넣었다. 몇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 최종적으론 청담동에 있는 한 작은 디자인 회사를 택했다. 일주일 후부터 출근을 해야 했는데, 마땅히 묵을 곳이 없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라 보증금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는 고시원을 알아봤다. 다행히 회사 근처에 괜찮은 고시원이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원룸텔이었다.
1월 1일이 출근 전날이었다. 나는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눈 덮인 청담동을 걸어 원룸텔에 도착했다. 내가 예약한 원룸텔은 청담사거리에서 한강 방면으로 200m를 걸으면 되는, 도산대로변 오모리찌개 건물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그곳의 이름은 노블(Noble) 원룸텔이었다.
2평 남짓한 원룸텔 안에는 좁은 침대와 작은 옷장, 큰 책상, 의자가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변기와 세면대가 있는 작은 욕실도 있었다. 아늑하고 깨끗했다. 남녀공용 원룸텔이라, 방 안에 욕실이 있는 편이 훨씬 안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환기는 잘 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고 난 후에는 방 안에서 뭔가를 먹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좋았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내 공간이 생겼다는 게 좋았다. 돌아와서 쉴 곳, 따뜻하게 몸을 뉘일 수 있고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왔다는 해방감이 나를 웃게 만들었다.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방엔 창문이 있었다.
창문이 있는 방은, 그 원룸텔에 사는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었다. 창문이 없으면 환기가 잘 안 되고, 낮이나 밤이나 깜깜하다. 우울해지기 쉽고 답답하다. 반면 나는 창문이 있어 해를 볼 수도 있었고 비가 오면 비 냄새에 젖을 수도 있었으며, 눈이 오늘날엔 새하얀 바깥 풍경을 볼 수도 있었다.
계약 당일 내가 원룸텔 주인에게 건네야 할 돈은 47만 원이었다. 사실 그 돈으론 창문 있는 방에서 살 수 없다. 창문 있는 방의 한 달 월세는 50만 원. 마침 내가 들어간 그 날, 창문 없는 방이 만석이었던 것이다. 주인은 선심을 쓰며 내게 며칠간 그 방은 허락해준다고 했다. 기뻤다. 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여기에서 창문이 없다면 정말 답답하겠구나.’
방을 보여주고 나가려던 주인의 손을 다급히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빌었다.
“제발 47만 원으로 이 방에서 지내게 해 주세요.”
이제껏 그렇게까지 빠르고 명확하게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지만 그 순간에 부끄러움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눈빛이 절박하다는 걸, 내가 느꼈다. 주인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나도 쉽게 물러서진 않았다.
“저 정말 돈이 없어요. 서울에 취직해서 이제 왔어요. 돈이 없어서 그러니까 그냥 47만 원에 여기서 묶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이요. 복 받으실 거예요.”
“아가씨, 창문이 있는 방에서 묶고 싶으면 돈을 더 내야 해.”
주인은 단호했다. 하지만 절박한 사람의 마음을 외면할 정도로 못된 사람은 아니었다. 한참을 부탁하고 또 빌었다. 결국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48만 원에 합의를 봤다. 신이 났다. 48만 원에 이런 방을 얻다니! 나는 행운아야! 캐리어에 들어있던 깨끗한 수건을 하나 꺼내 방을 구석구석 닦았다. 책상도 닦고 옷장도 닦고 의자도 닦았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더러워진 수건을 빨아 욕실 안에 걸어두고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희망찬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겠다고 말이다.
당시 내 연봉은 최저임금인 1,800만 원이었다. 한 달에 150만 원을 받으니, 차곡차곡 모으면 1년 후에는
월세 보증금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겠다 싶어 졌다. 희망이 차오름을 느꼈다. 그 희망은 딱 1달간 지속되었다.
1월 25일, 첫 번째 월급날이었다. 계약 당시 나는 두 달간 수습직원으로 월급의 일정 부분만 지급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대표가 중소기업 지원을 받기 위해 신청을 해둔 덕분에 140만 원에 가까운 돈을 받았다. 월급의 기쁨은 잠시, 이내 대표가 나를 불렀다. 계약보다 많은 돈이 입금되었으니 차액을 현금으로 달라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방을 나와 순순히 은행에서 돈을 빼, 10원 하나도 빼놓지 않고 공손하게 건넸다. 대표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그 돈을 받았다. 내 통장에는 100만 원가량이 남아 있었다.
2월 1일 고시원에 48만 원을 냈다. 통장에 52만 원이 남았다. 점심을 사 먹고 저녁도 사 먹고, 회사 생활에 필요한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화장품도 샀다. 청담동은 밥 값도 비쌌다. 고시원에선 흰 반과 중국산 김치를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일주일간 라면을 잘 끓여 먹었다. 적금은 불가능했다.
다시 또 한 달이 지났다. 통장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자꾸만 허기가 져서 무엇이라도 계속 먹어야 했다. 퇴근 후에나 주말엔 비좁은 방 안에 앉아 홀로 맥주를 마셨다. 2달 만에 4kg이 쪘다. 살이 찌는데 배는 자꾸 고팠다. 또 월급을 받았다. 이번에는 100%를 다 받았는데도, 잔액은 적었다.
뒤통수를 세게 맞는 기분이었다. 내가 품었던 희망은 세상살이를 모르는 순진하고 멍청한 시골뜨기의 망상이었음을 알았다.
1년이 지나도 이곳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멍청했다. 보증금을 마련하지 않으면 달리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통장엔 20만 원이 있었다.
불을 켜지 않고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에어컨 실외기가 반쯤 가리고 있는 창문으로 도산대로를 밝히는 붉고 환한 가로등 불빛이 들어왔다. 넓은 대로에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외제차들이 큰 소리를 내며 달렸다. 저 길 한가운데가 더 사람이 살 만한 곳 같았다. 따뜻한 숙소에 앉아 있는 나보다 차가운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따뜻해 보였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아무도 나한테는 관심이 없구나.’
불현듯 공포가 찾아왔다. 책상 밑 어두운 구석에 잠자고 있던 두려움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너는 실패자야,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해!’
두려움이 내게 말을 건넸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두려움에 감정을 내어주고 우는 일밖에 없었다.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내 일 년 월세보다 더 비싼 명품을 파는 샵과 유명 연예기획사, 드라마에만 나오던 부잣집.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별들이 가득한 청담동이었지만 내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 마음은 그곳에서 계속 움츠러들기만 했다. 그곳은 별을 쫓아온 이방인들이 죽어나가는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며칠간 인터넷을 뒤졌다. 여러 카페를 돌아다니며 방을 알아봤다. 괜찮은 방이 있었다. 보증금 10만 원에 월세 30. 욕실과 화장실은 따로 있었는데도 방은 훨씬 넓었고 여자들만 사는 곳이 안전할 것 같았다. 도미토리 느낌의 작은 셰어하우스였다. 근처엔 아파트와 주택이 많았다. 사람이 사는 곳 같았다.
원룸텔에 4번째 방세를 넣기 전날, 짐을 싸고 그곳을 나왔다. 청담동을 벗어나던 날, 해는 따뜻했고 공기도 상쾌했다. 완전한 봄날이었다.
그 날 이후로도 나는 자주 이사를 다녔다. 셰어하우스엔 비가 샜고, 친구와 함께 살던 집은 너무 좁았다. 집이 넓어지면 월세가 부담됐다. 그렇게 7년간 7번 짐을 싸고 또 풀었다. 청담동에서 방배동으로, 방배동에서 청파동, 후암동, 신림동, 봉천동을 거쳐 지금은 군포시에 자리를 잡았다. 집은 조금씩 더 서울 외곽으로 옮겨졌지만 마음은 더 편안해졌다.
고시원을 나와 셰어하우스로 갔을 땐 침대가 넓어서 좋았다. 그다음엔 방에서 요리를 할 수 있어서, 또 그다음엔 방 안에 빨래를 널어도 좁지 않아서, 책상을 놓을 수 있어서. 그렇게 조금씩 더 좋아졌다.
디자인 회사에서 글을 쓰는 일은 월급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사회초년생의 경우, 실력과 경력이 없어 열정 페이에 준하는 돈을 받으며 일하게 된다. 월급만 놓고 보면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출퇴근의 경계가 없어 삶이 피폐해지는데 그에 비해 월급은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고향에서 사는 삶이 이보다 낫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오늘이 왔다.
1달 전이었다. 내편과 테이블에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는데 내편이 내게 물었다.
“미야는 언제 처음으로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망설임 없이 답했다.
“1년 전부터!”
학자금 대출을 다 갚고 월세 보증금 500만 원을 손에 쥔 날부터 겨우 돈을 모을 수 있었는데, 그게 차곡차곡 쌓여 돈이 붙는 게 느껴졌던 게 딱 1년 전부터다. 감격스러웠지만 울진 않았다. 아직도 가난하니까. 하지만 편안했다.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다시 피어났는데, 그건 6년 전에 품었던 시골뜨기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감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행복해졌다. 그리고 나처럼 힘든 오늘을 살고 있는 누군가도 행복해질 수는 있다. 서울에 온 지 7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다. 낯선 회사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프로젝트를 한다. 이사를 자주 다녀 이제 주민등록증 뒷면에 스티커를 붙이는 일도 귀찮다.
여전히 통장 잔고를 넉넉하지 않고,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큰돈을 대출받아 전세를 살고 있다. 1년 6개월 후에는 다시 이사를 고민하겠지만 지금이 너무 즐겁다.
서울을 떠나 경기도의 이방인이 된 지 이제 5개월. 요즘 나는 즐거운 이방인으로서 살고 있다.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행복하고, 종종 만족스럽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벅차오르는 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