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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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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재 May 18. 2023

고향, 골목길 헤매기

-고창


  방문산 ·방장산 ·문수산 ·고산 등의 산들 안에 노령산맥 한 줄기 끌고 와 자리한 고창. 뜨거운 물에 담긴 비릿하면서 고소한 작두콩 차물 같은 곳. 아버지가 혼자서 꾸리는 삶이 소록소록 피어오르고 있는 그곳. 푸름 가득한 5월 안으로 들어간다. 이팝나무 꽃 만장을 이룬 엄마산소 가는 길 노동저수지는 텅 빈 시간을 받치고 있다. 엄마 가신지 11주기 구부러진 마음 명치끝에서 가늘게 떨린다. 나와 내 삶이 아닌 세월을 건너온 나의 스물아홉 해 그 안 숨은 엄마의 눈물 고여 이룬 노동저수지 물결무늬가 봉분 위에서 출렁인다.   


바슐라르는 말하지 않았던가. 시인에게 어린시절은 몽상의 샘물이라고.

   

 어린 날의 추억이 머물러 있는 곳. 호박죽 냄새 길어 올리던 저녁이 있고, 솔가지 태우던 연기 속의 아침이 있고, 만화책 가득히 쌓여 있던 골방의 깊은 밤이 있고, 펌프 물 끌어올려 등목 하던 한 낯의 짜릿함 있는 오두막은 사라지고 없지만 동산물이라 불리던 그 골목 그 길 따라 걷는다.    

  


 내가 첫사랑이었다고 첫 고백을 하였다고 하던 나는 기억에도 없는 그애의 우람하던 기와집은 사라지고 새로 건축된 집 뒤로 우거진 대숲 바스락 거리고 있다. 한 참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는 그 집 앞. 까다롭고 울퉁불퉁한 성격의 그애 만큼이나 세월의 더께가 깊다. 잠시 추억을 삼키다가 박완서 작가의 『그 남자의 집』한 문장이 빗금치고 간다.      


"첫사랑이란 말이 스칠 때마다 지루한 시간은 맥박을 치며 빛났다. 그 남자를 다시 만나기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아 있었지만 오래간만에 맛보는 기다림의 시간은 황홀했다”*『그 남자의 집』 p169     


“첫사랑 비밀 꽃처럼 피어나던 그 남자. 추억은 세월의 세계가 더할수록 빛을 발한다. 순수한 첫사랑과 황홀한 절망의 깊이로 …"**책표지 인용      


 댓잎 휘어진 옆으로 우뚝 솟은 성산 아파트 한자리 차지하고 유년의 풋풋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때도 지금도 변하지 않은 지붕 낮은 집들 서걱거리는 바람 뜸 새로 사부작사부작 걷는다.      

 

  수줍음과 기쁨 슬픔이 적절히 섞인 어린 날의 여기. 탱자나무 가시 콕콕 찌르던 그 골목에는 탱자나무 사라지고 페인트 빛바랜 스레트 지붕에 무너진 돌담과 벽돌담 사이 양철대문에 매달린 단추하나. 하늘 향해 누르고 허공을 향해 누르고 내 마음에게 누르던 부저소리 들리지 않지만 하교 길에 장난으로 초인종 누르고 도망치던 집. 주인에게 잡혀 혼나기도 한 소녀에게는 그게 놀이였고, 친구였고 재미였던, 아련함이 조각조각 피워 오른다.    

    


 

도랑물 졸졸 흐르던 흙길은 복개하여 시멘트 바닥이 대신하고 있다. 사춘기 때 동경인지 짝사랑인지 모를 미술선생님의 하숙집 담장 너머 채마밭 사라지고 지붕을 넘고 있는 햇살 무더기 받아 않으니 그 시간들이 물컹물컹 심장을 두드린다. 


짓다 만 건물 제 모습 갖춘 지 언제인지 모르지만 마당 한가운데 세발자전거와 목마가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가슴속에 있는 길을 걸으니 고향은 동네는 그렇게 해찰하며 어슬렁거려도 꿈길을 걷는 듯하다.


 골목에서 대로로 조금 나오니 고창읍성 한옥마을 펜션 담장 옆 사랑을 점치라는 꽃말처럼 하얀 옥스테이지 지천이다. 가로수가 소나무인 길 따라 고창문화예술회관 주차장으로 사라진 나의 푸른 한 때 그리고 고향집. 주차장 한가운데 서서 어디쯤에 나의 풋풋함이 잠겨있을까 뜯지도 않은 채 돌아온 편지처럼 유년의 기억을 돌리고 있는, 그렇게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이고 있다.


 


은행잎 구름처럼 떠다니던 앞마당. 철쭉 물든 화단 위로 동백꽃 뚝뚝. 사이사이 채마밭 만들어 보라꽃가지 열매 주렁주렁. 호박넝쿨 길어진 담장을 매달고 둥그렇게 그네를 타던 여기, 어디쯤 모시 잎 뜯고 있었던 엄마의 모습과 살구열매 주워 먹던 내 무릎 앞으로 붉은 자동차 다가온다. 유년의 한 소반을 아스팔트에 묻어 버린 주차장은 침묵이고, 파낼 수 없는 파뿌리 같은 한 시절이 그림자를 지우고 있다.


 내 몽상의 근원을 찾아 기억 속의 옛것을 찾아 나선다. 판소리 여섯 마당을 집대성하고 국문학사에 뛰어난 족적을 남긴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사립문 저 너머 지금은 도로가 된 고창 경찰서 터를 생각하다 고택 한 바퀴. 뒤뜰은 동리국악당(동리는 신재효의 호)과 모양성(왜구침입에 대비, 1453년 세운 자연석 성곽. 일명 고창읍성)에 대고 있다. 중요 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된 신재효의 고택은 1850년경에 지어졌으며, 현재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로 지어진 사랑채와 오동나무, 우물 등이 남아 있다. 녹음 짙은 고요가 가로질러 간다. 사그락거리는 내 발자국이 풀고 있는 판소리는 여섯 마당 중 어느 부분에 있을까. 그 발자국 찍힌 곳을 찾아 내 마음속을 내내 헤맨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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