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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재 Apr 05. 2024

물들어진, 그 30년

-북해도


  “눈은 한 편의 시다. 구름에서 떨어져 내리는 가벼운 백색 송이들로 이루어진 시/하늘의 입에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시이다./그 시는 이름이 있다./눈부신 흰빛의 이름./눈.”     


 치도세 공항에서 아사히카와로 이동하는 차창 밖 북해도의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날씨에 프랑스 작가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속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눈은 우리에게 풍경화이고 한 편의 시로 감싸주고 있습니다.     

 

 아이들 유치원 동기인 엄마들 정옥. 태숙. 현자와 처음으로 함께 떠나온 해외여행은 가슴 떨리는 설렘입니다. 그 아이들은 자라 몇 년 전 결혼한 친구, 올해 결혼 준비 중인 친구, 예비 엄마인 친구, 아직 결혼할 의중이 없는 친구도 있지만 우리 엄마들은 30여 년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1996년에 오픈한 아사히카와 '라멘무라'는 8개의 각각 특색 있는 라멘 전문점이 모여 있어  골라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취향대로 골라 주문한 라멘의 맛은 맵거나 느글거리거나 별 감흥 없는 맛이었지만 술을 마시지 못하는 우리들의 생맥주 맛은 어디에도 표현되지 않은 부드러움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아마 첫 입맞춤이 이러하였을까요.     

 

 눈이 오고 눈은 쌓이고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두근거림으로 쌓이는 눈. 저 바깥 어디에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호텔 창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눈은 그치지 않고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 아름다운 시로 거리 곳곳을 날고 있습니다. 그러다 지치면 어느 품에 들어 쉴까요. 늘 문장의 지옥에서 헤매지만 제대로 된 시 한 편 엮어내지 못하는 요즘의 나에게 들어와 숨 쉬었으면 좋을 꿈 꾸어 봅니다. 쉼 없이 오가는 제설차에 아침은 이어지고 일본 CF에 자주 등장한다는 ‘패치워크’ 길 하나인 듯 둘인 미루나무 서로 키재기하며 허공의 눈을 쓸고 있습니다.   

   

패치워크 길 둘이 하나인 듯한 미루나무


 가이드 천화영 님의 여행지 설명은 인문학 강의실입니다.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 문화와 인물들을 비교하며 알기 쉽게 설명하는 모습에 푹 젖어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합니다. 나는 오래전 읽고 보았던 소설과 영화 중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아사다 지로의 『철도원』을 다시 소환하여 복습하는 기분은 여행 주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늘 담은 듯 푸른 연못 ‘아오이이케’는 눈 속에 묻혀 하얗고 자작나무 눅눅한 겨울로 가득합니다. 추위 속의 고요. 바람의 힘에 부쳐서 웅크리고 있는 나무 사이로 쉭쉭쉭 숨소리 날고 있습니다. 카모마일 티백을 우려내듯 우려낸 세월을 지층의 표면까지 다 우려낸 지상의 마지막 얼굴 같은 모습의 자작나무들, 그 사이로 우리는 동백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열 지어 추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흰수염폭포
하양에 가려진 파랑 -푸른연못

 

  

  순백의 집을 열기 위해 먼 길 돌아온 북해도. 내 고향 고창은 눈창이라 불릴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립니다. 유년시절 동생들과 뒷동산 비료부대로 눈썰매 타던, 물 뿌려 얼려둔 앞마당에서 나무썰매 타던 그 지겨움의 겨울을 오타루 오르골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여기저기서 꽈당, 미끄러지는 모습들 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조심하며 걷자고 아장아장 걸음마 배우듯 걷자고 다짐합니다. 상점의 반짝임보다 얼어붙은 거리가 더 반들거리고 있는 여기에서 우리는 서로의 골절상을 염려하면서 염화칼슘도 연탄재도 뿌려지지 않은 거리에서 안도현 시인의 시 「연탄 한 장이」 왜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오타루 운하
오르골당 시계탑


  북해도에서 가장 큰 칼데라호인 ‘도야호수’ 유람선상에서 구입한 새우깡으로 갈매기를 유인합니다. 멀리 성층 화산이며 활화산이라는 요테이산이 친구들 손에 있군요. 잡을 수 없는 것은 멀리 있지만 잡히는 마음은 내 안에 있으니 이미 요테이산은 그대들 것입니다. 단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라는 것. 또한 사람들의 감정 또한 이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처음에는 강한 지진이 이 일대를 덮쳤고, 그 후 보리밭이 융기되면서 산이 됐다는, 쇼와 시대에 새로 생겨 ‘쇼와신산’입니다. 가장 높은 표면 온도가 300도 넘어 오를 수 없다는 산은 오늘도 뜨거운 화산가스를 내뿜고 있습니다. 마치 뭉게구름 피어나는 것 같습니다. 산봉우리 바라보다 나에게 시어는 뜨거워 닿지 못하는 쇼와신산처럼 잘 연결되지 않아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고, 고민이 고민에게 묻고 있습니다.     

 

요테이산(작은 휴지산)
도야호수

  

  

쇼와신산


  패키기 여행은 서로 다른 만남이지요. 친해질 수도 무심할 수도 있는 잠깐의 함께이지만 만남은 아름답습니다. 하린님과 두 딸들이 그렇습니다. 친절하게 밤의 삿포로시내 중심가를 걸을 수 있는 즐거움을 준 두 친구의 길 안내로 돈키호테 쇼핑 갑니다. 우리들만은 할 수 없는 시내 밤의 외출. 눈 쌓인 밤의 번화가 버스킹이 있고, 활기와 젊은이 넘치는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선사하며 도착한 쇼핑몰은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아 수란스럽지만 재미있습니다. 일본산인 줄 알고 회비로 구입한 교세라 세라믹식칼은 중국산이었음을 집에 와서야 알고 통탄하며 웃었지만요.   


삿포로 시계탑
오도리공원
삿포로 TV 탑


 


  여행의 묘미는 무엇일까요.      

  열쇠를 방안에 꽂아놓고 나와 보조키를 부탁해도 호텔직원과 번역기로조차 소통되지 않은 언어의 벽 앞에서 소통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터득하고,      


  일본 전통 옷 입고 기념사진 찍으며 배꼽 움켜쥐고 웃을 수 있는 여유와 늘어진 몸매 자랑하며 온천욕으로 서로의 마음 녹이며 다른 시간의 나를 바라보는 일.    

  

  서로 엇갈린 만남의 장소로 생긴 오해와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앞이 안보일정도로 눈발 휘몰아치는 길 빛의 속도로 달려도 제자라인 것 같은 오도리공원 tv탑이 멀고 아득하기만 하던,     


  트렁크 무게에 짓눌려 치도세 공항 구석진 자리에서 더하기 빼기를 아무리 하여도 15Kg의 숫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시간만 오그라들던 사연 한 소절 엮어내던,    

  

  티켓 팅이 꼴찌여도 입국심사가 맨 끝이어도 괜찮아 그러나 배고픈 건 참을 수 없어 비행 중 우리들 저녁 식사대용 비닐봉지 현자의 배낭에 매달려 바스락거리며 마지막까지 웃음 남겨지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또 떠나고 싶어 집니다. 이 친구들과 여기 아닌 즐겁고 행복해지는 그 어딘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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