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0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재 Jan 23. 2020

그리움의 성벽을 쌓다

-다시 고창


걸어온 만큼 걸어가면 만날 수 있을까. 수없이 걸어왔지만 만나 지지 않는, 아니 만나질 수 없는 너와 나의 관계처럼 성 밖 산책로와 성곽 길, 성곽 길과 성안 산책로의 관계를 뚫고 걷는 읍성에서의 하루다. 

     

함박눈 펄펄 날리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며 눈밭 뒹굴었던 추억의 이름들은 없지만 수 만 겹의 바람이 묶였다 가는 곳이며, 나무들이 바람의 고삐를 풀어주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 돌아보면 허공이다. 하지만 사춘기 소녀였던 한 시절이 웅크리고 앉아 기다림의 성벽을 쌓던 아련한 곳이기도 하다.  


 


맹종죽 와글와글 소란스런 대나무 숲에서 쉭쉭쉭 지나가는 바람 소리 붙잡고서 영화 『봄날이 간다』 주인공처럼 대숲 한가운데서 귀 기울인다. 자연에 담긴 아름다운 소리 듣고 있는 순간이 조금 두렵다. 잡아낼 수 없는 소리들이 지나가는 것 같고, 잡을 수 있는 소리 또한 온 몸을 휘감고 지나간다. 텅 빈, 그러나 가득 찬 대나무와 소나무가 엉켜 서로 의지하며 자라나고 있다. 자리 비워주며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지켜주는 성황신 사당 <성황사> 지나 남치 성곽 길을 걷는다.     

 

혼자 걸어도 아슬아슬 좁았던 황토 질퍽한 옛길은 이제 없다. 시멘트로 덧칠하면서 길은 넓어져 두 사람이 손잡고 걸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넓어진 문명이 지워버린 그 길 따라 연인이 두 손 꼭 잡고 지나간다. 어릴 적 엄마 귀례씨 치마폭 잡고 오르던 딸과, 엄마가 되어 꼬맹이 아들과 걸었던 성벽 길에서 잠시 추억에 잠겨 본다.        


멀리 물 빠진 노동 저수지 그 너머 엄마 산소는 보이지 않지만 10년 세월 성묘 가던 도로는 햇볕 따라 손 뻗은 소나무 가지 성벽 터널을 만들고 있었다. 등양루(동문) 성곽 밖 언덕배기 그 옆 겨울방학이면 학원 대신 두 아들 동윤, 동주가 비료포대 눈썰매에 엉덩이가 푸른 소나무처럼 물들던 곳이며, 시린 손발 부비며 성 밖의 소란이 성안을 감싸주던 곳이다. 오고 가는 하루, 맞이하고 보내는 계절처럼 어린 두 아들은 성인이 되었다.


 그립지 않은 사람으로 저물어가는 내가 여기에 있을 뿐이다.  

   

 


 공사 중인 등양루 사이로 빠져나오니 ‘작청’ 양지 바른 툇마루에 앉아 잡담 중인 어르신 서너 분이 쉬어가라 한다. 보약보다 더 좋은 햇볕 받아 가라 한다. 읍성의 풍경 한 장 그림자에 새겨 넣고 따듯한 공기 한 숟갈 떠서 지친 삶에 버무려 보고 싶은 마음 잊고 떠돌고 있는 잠시 나를 내려놓고, 그렇게 한참을 마루 한 귀퉁이에 앉아 진한 사투리 줍는다. 배낭을 뒤적거려 초콜릿 드리니 한 분께서 “하나는 안 되는디. 두 개는 줘야 하는 거 아녀.” 하신다. 나도 한 시절 저런 사투리로 옴쭉거렸는데 고향 떠난 세월만큼 잊혔고 다시 그리워지는 나이가 왔다.  


  탁자식 지석묘와 연못이 노닐고 있는 잔디 위로 한바탕 웃음 지나간다. 풍화루 단청 우아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옆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졸졸 흘러내리는 약수터 물을 붉은 바가지가 엎드려서 기다리는 하루해가 길고 춥다. 



고창읍성(모양성)은 사적 145호로 둘레 1,684m의 테머리식 산성으로 동·서·북의 문과 3군데의 옹성이다. 그리고 6개소의 치성이 있다. 읍성이면서도 고을을 둘러싸지 않고 산의 계곡을 감싸 만든 산성이다. 성 밖에 외성이 없고 내성 하나만 있는 홑성으로 여성들이 윤달 6일, 16일, 26일엔 저승문이 열리고, 9일, 10일, 19일, 20일, 29일, 30일에는 귀신이 쉬는 날로 답성 놀이를 하면 무병장수, 극락승천 한다는 풍습이 있다.    

  

한낮 햇볕을 안고 들어와 저물어 가는 노을 깔아 놓고 나가는 읍성이다. 이 곳엔 모교가 있었던 자리인데, 성안에 있던 여중·고는 이전하였고 지금은 조선시대 관아로 복원 되었다. 학창시절 점심시간, 하교 후 성안을 휩쓸고 다녔던 아련함이 서린, 많이 왔고 보았고 뛰놀았던 곳이며, 늘 왔지만 늘 보고 싶은 곳이다. 담쟁이넝쿨로 무럭무럭 번지는 추억의 문장 한 줄 남기고 간다.


한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 따라 고향 간다 너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몸살로 뒤척이던 봄날이다      

 

철쭉꽃 진 저물 녘 어둠이 먼저 와 기다리고 공북루 주춧돌 조명등 아래로 내려앉은 꽃잎들 속절없이 날리고 있다      


구멍 뚫린 한 시절이 화강석 돌기둥에 묶여 어둠 가려지는 문루에 기대어, <옹성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을 쌓았다> 진정 옹성을 쌓았던 것은 너를 밀어내기 위함은 아니다


별빛 서린 성벽처럼 오래 견딘 바람의 두께가 겹겹이 쌓여 이룬 계절마다 너는 멀리 있다 내 가슴에 높이가 있어도 널 바라볼 수 없어 돌덩이 안고 철쭉얼룩 지웠던 붉은 날들이다      


한 줄의 문장을 얻기 위해 헛발 디딘 감정의 돌덩이 무게가 이룬 성처럼 나의 기다림 틈새로 살아생전 극락세계 들어서는 발자국들 조명 빛 닿아 타고 있다 풀리지 않는 너라는 낱말 뭉치 뭉텅, 유성우로 쏟아지는




이전 09화 쉼에 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