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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훈 Sep 19. 2020

"나 다시 시골로 내려갈까?"

"지훈아. 재수해라."

"싫어. 안 해."

 수능이 끝나고,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교의 명단이 예측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나한테 재수를 권했다. 내 모의고사 성적을 통틀어서 제일 미끄러졌었고, 우리 가족은 당연히 내가 선생님이 되기 위한 진로를 밟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문턱의 첫 번째에서 나는 크게 미끄러졌고,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그래도, 재수는 정말 하기 싫은 걸...'

 재수는 정말 하기 싫었다. 어릴 때 가난했던 삶이 막막했을 때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게 좋았다.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고 있으면, 자유로웠다. 나는 정말 원하지 않았는데, 7살 무렵에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왔다.  너무 어린 나이였는데, 그 시골에서의 삶이 막막했다. 겹겹이 쌓인 가로막이 우리 가족의 삶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삶에서 마음 놓고 숨을 크게 쉬고, 소리를 질러 본 적이 많지 않았다. 책상에 앉아 가만히 하는 공부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나를 방해하지 않는 독서가 좋고, 나를 자유롭게 하는 시가 좋았다. 인생의 관문이라 학생의 역할은 했지만, 정해진 답을 맞혀야 하는 수능 제도는 그래서 더욱 싫었다.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해야 하는 교육이어야 청소년기에 도움이 되는데, 지식만 답습하는 교육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재수를 선택하지 않았다. 내게 수능은 또 하나의 감옥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대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은 아버지가 홀로 계시던 곳이었다. 어릴 적 가끔 올라가던 곳인데, 이제 내게 익숙한 장소로 만들려고 하니 처음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릴 적 오랜 기간 떨어져 있어 내게 정말 다정하게 잘할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는 무뚝뚝함 그 자체였다. 아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다 보니, 내 성장기에 아버지와 갈등이 없었고, 아버지는 아들과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잘 모르는 분 같았다. 아버지 본인의 스타일대로 생활을 했다. 퇴근하면, 컴퓨터를 켜고 고스톱 게임을 하셨고, 방에서 담배를 피우셨다. 이사하기 전까지 좁은 단칸방에서 함께 지냈는데 "원고, 투고!"라고 울리는 게임 소리와 담배 연기가 난 정말 싫었다. 물론, 지금 우리 아빠는 그때의 오해도 풀고 대화도 많이 하고 표현도 많이 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믿는 절친이 되셨다.


  아버지의 집에서 대학교까지의 거리는 지하철과 스쿨버스로 족히 2시 30분은 되는 거리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거기서 다니냐며, 학교 앞에 월세를 알아봐 준다고 하셨는데 내가 반대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커서 아버지랑 지내기로 결정했다. 물론 나중에 독립했다. 왕복거리가 너무 힘들었고, 아버지랑 살다 보니 집안에서의 동선 등 부딪히는 게 많았다.

 학교에서의 생활은 낯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나는 지하철 노선도도 몰랐고, CGV가 뭔지도 몰랐으며, 대학교 친구들이 아웃백에서 모인다는데 "알겠어"라고 대답해 놓고, 아웃백이 어딘지도 몰랐다.

 자신감이 없었는지 자연스럽게 친구들한테도 말을 조심스럽고, 쑥스럽게 하게 됐다.

 "나 지훈이랑 말 좀 하고 더 친해지고 싶어."

 한 번은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쭌이라는 친구가 내 뒤통수에 대고 옆에 테이한테 저 말을 건넸다. 내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수줍은 내 태도에 친구들도 머뭇거리게 되었다. 근데 지금 쭌이는 저 때 저 말을 가장 후회한다고 한다. 이렇게 말도 잘하고, 실천력 대박인 내가 될 줄은 쭌이도 몰랐다고 한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처음에 쟤가 대학교 생활을 잘할까 걱정했다고 한다. 아직도 친구들은 모이면 저 얘기를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내가 순수의 결정판이었다며 거들곤 하는데 친구들은 그럴 때마다 내 말을 무시하고 내 잔에 술을 말없이 채운다.


아무튼...

 '대학교에서의 초반 성적은 어떠했는가.'

 성적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못 받았다. 돌이켜 보면 한 끗 차이였고, 당시는 '이게 시골과 서울의 격차란 말인가'하고 많이 좌절했다. 내 좌절에 친구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당 인문학부에서 논술형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친구들이 A를 받으면 난 C를 맞았다. 그럴 때마다 내가 쓴 내용이 뭐가 문제인지,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알고 보니 문장과 문단의 구분, 글을 쓸 때 들여 쓰는 방법을 나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논술이며, 토론 등의 과외, 학원 수업을 나는 받지 못했다. 자연스레 방법을 모르는 무식한 글을 썼고, 점수 또한 낮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 잘 놀다가 주도적으로 대학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무엇부터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하긴 했는데, 그냥 하기만 했다. 당연히 시험 문제의 의도를 모른 채 답을 썼다.




  1년의 성적이 나왔고, 나는 국문 지망에서 국사로 떨어졌다. 국사는 내가 제일 재미없어하는 학문이었다.

 결과를 가지고 강의실에서 나와 터벅터벅 벤치로 향했고,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빠져나와 내 곁을 지켰다.

 "지훈아, 어떻게 하니. 너 국사 할 거야?"

 "몰라... 다시 시골 내려가야 되나. 서울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가 봐."

 "시골 내려가서 소 키우게? 야 너 진짜 내려가는 거 아니지? 정신 차려."

 "어머.. 얘 표정 보니 진짜 시골 내려갈 느낌인데.."

 "안겠다! 야. 지훈이 기분도 안 좋은데 낮술 하러 가자."

 "그럴까?"

 "야. 그래. 성적 그까짓 거 술 먹으면 다 없어져. 알코올로 지워버려"

 내 몸은 그 말에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친구들과 학교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걸을수록 국사라는 학문이 내 발목을 무겁게 잡는 기분이었다.

 '근데. 국사라니... 뭐가 이렇게 삶이 꼬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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