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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하여

고(故) 안상배의 손녀 이야기

by 비비안

나는 30살, 만으로는 28살이다.


중학생 때 미국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갔고 친오빠와 함께 낯선 타지생활을 이겨냈다.

외롭고 무서울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친족이 함께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든든했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오빠는 금방 다른 지역 대학교에 입학했고 그렇게 난 혼자가 되었다.


물론 보호자인 가디언이 있지만 돈을 주고받는 고용관계임으로 불편한 사람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부탁 한번 하기 어려운 고용관계. 부모도 아닌 것이 남도 아닌 불편한 관계.

그렇게 나름 어린 나이에 외로움, 불안함, 고독함을 경험했다.


그때 미술이 나의 단짝친구였다. 부정적인 감정을 그림에 옮겼다.

무슨 의미의 그림인지 설명도 못하면서 그냥 열심히 종이에 생각을 그려내는 작업을 했다.

유일하게 내가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미술이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뉴욕에 있는 미대에 합격했다.

위에 말했듯 미술만 했기에 토플점수는 엉망이었다.

뭐든 그렇듯 현지에서 쓰는 언어와 시험을 위한 언어는 차이가 있다.

공부과 친하지 않았던 나는 토플 점수를 채우지 못해 부끄럽게도 ESL이라는 여름 클래스를 들어야 했다.


토플만 준비되었다면 더 좋은 대학교에 장학금도 받고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당시 나는 미련하고 게을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우울했다. 무기력했고. 긴 타지생활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게 문제였을까. 그때부터 아슬아슬했던 나의 생활들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전답사 한번 없이 뉴욕에 있는 미대에 입학을 했다.

여름 방학을 온전히 한국에서 놀고 싶었기에 학교장을 찾아가 거짓말을 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위급해서 ESL 여름 클래스를 못 들을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헛웃음이 나오는 핑계이다. 저급한 핑계.


한국과 다른 의미로 미국은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미국에서의 고등학교는 한국에 비해 더 자유롭고 실수를 수용해 주는 분위기이고 대학교는 그냥 철저한 성인들의 사회이다.


그러니 학교장은 당연히 대답했다. "No. No excuse."

한 마디로 빠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름방학부터 뉴욕에서 언어보충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1학년 수업을 연달아 시작했고 나는 대혼란에 빠졌다.

난 그냥 우울한 감정이 싫어서, 답답한 감정이 힘들어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었는데 대학교에 오니 미술에 미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 경쟁자처럼 느껴졌고 불안하고 위축되었다.


나의 미술이 너무 하찮아 보이고 소심해졌고 결국 숙제조차 잘 해갈 수 없었다.

무기력해졌고 방향을 잃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미술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슬퍼야 작품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난 죽을 때까지 슬퍼야 하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뉴욕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냄새나고 정신없으며 공허하고 외로웠다.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마지막 마무리를 장식해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아주 잠깐 교제하던 이성친구였는데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있으니 헤어지자고 나에게 통보했다.

헤어지는 건 괜찮았다. 헤어질 수 있지. 하지만 그 과정이 깔끔하지 않았기에 문제가 있었다.

너무 일방적이었고 이기적이었던 친구였기에 결국 나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


어렴풋이 기억하는 소문으론 그의 아버지가 자살시도를 했다가 병원에 누워있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렇게 이별을 핑계로 유학의 마무리 점을 찍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허락 하에 휴학계를 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말이 휴학이지 자퇴를 할 생각으로 돌아왔었다.


부모님 얼굴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우리 집은 아주 잘 사는 집은 아니다.

그냥 원하는 거 있으면 사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먹고 정도의 중산층이다.

그럼에도 자식 두 명을 유학 보냈는데 이렇게 수확한 거 없이 돌아오다니, 너무나도 죄송했다.


썩은 씨앗이 된 기분이었다.

꽃을 피우지 못하고 썩어버린 씨앗 말이다.



귀국 후 그냥 멍했다.

생각이 많은데 생각이 없었다. 길을 잃은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자주 술을 마시고 자주 나갔다. 그냥 매일 나가서 시간을 보냈다.


방황시기의 나를 보던 아버지가 참다못해 말하셨다.

"그렇게 집에서 빈둥거릴 바에야 자격증이라도 따서 우리 일을 도와라."


그렇게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을 한 번에 땄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본 순간이었다.

교재를 3번 정독하고, 개인 노트를 만들어 요약본을 만들어 달달달 외웠다.


덜덜 떨면서 시험을 봤고 60점 후반대로 합격했다.

그 결과가 적힌 시험지를 들고 나는 엉엉 울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어두운 방바닥에 쭈그려 엉엉 울었다.

그 후, 열심히 실기와 구술을 준비했고 이 또한 한 번에 붙었다.


부모님 헬스장에서 트레이너로 바로 활동을 했고 꽤 인기 있는 트레이너로 지냈다.

운동하기 싫어하는 여성 고객들을 맞춤형으로 재밌고 즐겁게 운동시켰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다.



그럼에도 우울했다.

초반에는 우울감에 폭식을 하고 먹토를 하기도 했다.

트레이너가 먹토라니 말도 안 되는 모순이지.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배고파하는 나도 보기 싫고, 배부른 나도 보기 싫고, 토한 후 거울 속 얼굴과 눈이 빨개진 채로 눈물 고인 내가 제일 미웠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몇 달 만에 급성 위경련이 생겨 그 행위를 그만둘 수 있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지만 어느 순간 주말이 되면 사무치게 우울했다.

우울할 때마다 다시 스케치북을 꺼내 끄적끄적 그림을 그렸다.


주말이 없어졌으면 했다.

활기차고 사람이 북적거리는 평일이 더 좋았다. 즐거웠다. 우울감을 잊을 수 있었기에.

우울을 잊기 위해서는 더 많이 움직여야 했다.

주 7일 운동, 한강 워킹, 당근알바, 자격증(생활체육자격증 노인, 생활체육자격증 유소년, GTQ 1급, 한식조리자격증, 양식조리자격증) 공부를 하며 쉼 없이 움직였다.


우리 집 요리사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나였다. 엄마가 재료를 공수해 주면 무엇이든 만들었다.

꿔바로우, 구절판, 떡볶이, 자장면, 짬뽕, 라자냐, 풀드포크, 치킨스톡...

무슨 요리던 티비에서 보이면 만들었다.

감사히도 맛이 있던 없던 부모님은 맛있게 드셔주셨다.


이 모든 것을 수행해도 우울해졌다. 그러면 또 새로운 시도를 했다. 바로 베이킹.

치아바타, 꽈배기, 바게트, 베이글, 모카번, 소시지빵, 피자...

유튜브에 뜨는 베이킹 영상들은 모두 저장해 두었다가 하나씩 해 먹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빵 킬러이시기에 내가 만든 빵을 참 좋아하셨다.

한 두 조각 방에 넣어드리면 굳이 우물우물 씹으면서 나오셔서 "참~ 맛있다. 기술자야 기술자~! 뭐든지 배워야 한다. 알겠지? 난 빵을 참 좋아하거든?"라는 단골멘트를 내뱉고 방귀를 한번 뀌시고 다시 들어가신다.


종종 딱딱하고 질긴 빵이 나온 적도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잔반 없이 맛있게 드셔준 엄마 아빠가 있었기에 계속 무언가를 만들 수 있었다.


직업은 트레이너인데 우울감을 달래기 위해 요리와 베이킹을 너무 열심히 해서였을까 체지방을 14프로 이하로 내려본 적이 없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평일, 우울한 주말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6년이 지났다.

그 쯤 코로나 팬데믹이 왔고, 헬스장 규모가 줄어들고 회원도 줄었다.

피티자들도 줄어들어 결국 피티를 받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어차피 트레이너를 최종 직업으로 생각했던 건 아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직업을 찾기 시작했다.

당근을 통해 이것저것 단기알바를 했고 그러던 중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일을 시작했다.


홀 서빙 알바였지만 조금씩 요리도 배울 수 있었다.

요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요리사를 해볼까 싶어 열심히 일을 했다.

코스요리 오마카세 레스토랑이었는데 한 손님당 6번 정도 음식을 서빙해드려야 하고, 같은 수만큼 그릇을 치워드려야 했다.

레스토랑이었기에 매일 다른 음식 설명도 해드려야 했고, 와인 주문이 들어오면 준비도 해드려야 했다.


술을 잘 못 마시는 나는 와인을 오픈해 본 적이 없었기에 매번 와인을 따며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

코르크를 분지른 날은 정말.. 알바 내내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다리는 퉁퉁 붓고 정신은 아득해졌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느 순간부터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지 소화약 오타이산을 들고 다녔다.

하루 근무시간은 5시간뿐인데도 항상 1시간 정도만 일하면 위가 꼬였다.


음식을 실수로 잘못 내면 어쩌지, 메뉴명을 못 외우면 어쩌지, 오늘도 와인 코르크를 잘 못 따면 어쩌지.

이러면 어쩌지, 저러면 어쩌지.

게임처럼 레벨이 높아질수록 긴장이 되었다. 지금 실수하면 나는 다시 레벨 0이 되는 거야.라는 부담감이었다.


일이 익숙해질수록 위는 더 자주 꼬였다. 서비스직이기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손님들에게는 웃으며 메뉴설명을 해주고 화장실에 가서 소화약 오타이산을 먹었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아무도 알지 못해. 내가 아프다는 것을.

티 내지 않았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그게 너무나도 외로웠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일을 냈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보이셨다.

새벽에 현관문을 열어놓고 자전거를 수리하러 내려가신다거나, 동네 산책을 하신다거나 하는 이상행세를 보이셨다.

하도 심심해서 그런다고 하셨지만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이었기에 우리 가족은 전부 비상에 걸렸고 나는 일을 그만두었다.


몇 달 일을 하며 요리사는 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기에 겸사겸사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지인의 추천을 통해 무료 국비지원 캠프에서 운영하는 UXUI디자이너 트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디자이너 계열이니 미술이기도 하고 원인분석 및 문제해결을 좋아하던 나는 이 수업을 신청했다.


온라인 코스였기에 할아버지를 관리감독하며 공부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2024년 1월부터 6월까지 매일 12시간씩 열심히 강의를 듣고, 실습을 하고,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온 열정을 다해 공부를 했고 하다 보니 UXUI디자이너보다는 PM이라는 프로젝트 관리 업무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해당 캠프의 PM 관련 직무에 지원을 했고 짧은 계약직이지만 합격했다.

이때 정말 행복했다. 세상이 반짝반짝. 명도와 밝기 자체가 달랐다.


"아 세상이 정말 행복하구나. 아 아름답다. 나 드디어 하고 싶은 것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서울역을 지나가며 행복에 겨워 울었고, 집 밖을 나와서도 햇빛을 받으며 걸으면서도 울었다.

너무 밝고 찬란해서 행복해 죽을 것만 같았다.



반짝이던 나의 세상과는 상반되게 할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셨다.

의사의 말을 안 듣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던 할아버지는 당뇨와 신장병이 심각해져서 다리가 퉁퉁 붓게 되었다. 결국 매일 마시던 술은 금지당하고 음식도 절제당하셨다.


그리고 점점 이상한 행동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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