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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에 대하여-3

by 비비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시신은 하얀 들것에 실려 집 밖으로 나갔다.

그럼에도 아직 할아버지가 집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 방을 보았다.

불이 켜져 있는 방.

할아버지의 옷들.

방금 누가 자다 일어났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침대.

할아버지의 수첩.

할아버지의 붓들과 서예 종이들.


그대로다.

모든 게 그대로이다.

그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일 것이다.


나는 억지로 움직여야 했다.


짐을 챙기고, 고양이들의 밥을 산더미만큼 채우고 차를 탔다.

"다녀올게." 고양이들에게 인사했다.



아빠에게 운전을 하기 전 조심히 가자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밤 드라이브를 하는 느낌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이질감...


하나만 집중하자.

장례식을 잘 끝내야 한다.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차를 타고 경찰서로 가는 길, 창 밖을 보니 술 취한 사람과 귀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평온했다.


경찰서에 도착해 아빠는 형사와 대화하러 조사실로 들어갔고 나와 엄마는 로비에 앉았다.

엄마와 앞으로 어떤 것들을 해결해야 하는지 대화를 나누었다.


우선 난 회사 상사와 동료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냥 조부상을 당했으니 3일 출근 못 한다고 말하면 되었을 것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도와달라고 문자를 남겼었다.


상사는 휴가 중이라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답장을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동료가 연락을 바로 받아 출근을 못하는 상황을 전달해 둘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한 번도 전화를 늦게 받지 않던 친구인데 그날따라 3번, 4번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똑딱. 똑딱.

1분, 3분, 5분..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은 고조되고 나의 죄책감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누구라도 빨리 도와줘 나를.


엄마와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가 자살을 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지금 서류 관련 일 때문에 경찰서에 와 있다고 둘러댔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남자친구의 위로를 듣고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듯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직도 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이해되지 않았다.



30분 정도 후 아빠가 조사실에서 나왔다.

얼떨떨한 아빠의 얼굴.

우리 셋은 모두 얼떨떨했다.


다시 차를 타고 이번엔 헬스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목요일이었기에 금요일과 토요일 헬스장 운영을 안 한다고 회원들에게 단체문자를 보내야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듯한 경험을 했어도 우리는 현실을 살아야 했다.

우리의 삶은 그런 것이다.

이를 악물고 해결해야 한다.


헬스장에 도착해 회원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안내문을 프린트해 입구에 붙인 후 다시 차에 탔다.

이제 장례식장으로 가면 된다.



차를 타고 가며 라디오를 켰다가.

다시 껏다가.

노래를 켰다가.

다시 껏다가.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가.

정적이 흘렀다가.


지금 생각해 보면..

다 함께 기도를 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우리 가족은 교회를 안 간 지 너무 오래된 상태였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사무실에 찾아가니 서류에 인적사항을 적으라고 했다.

금액을 안내받고 장례식 관련된 정보를 받았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진행될 방에 가 앉자마자 직원이 왔다.

꽃 스타일은 어떻게 할 것인지, 노래는 어떤 것을 틀어놓으면 좋을지, 음식은 어떤 가격대가 있는지, 향을 할지 초를 할지.


우리는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도 선택을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례식을 치러야 했기에 서로 의논을 하며 하나씩 결정해 나갔다.


직원이 떠나고 엄마는 고모에게 전화를 했다.

"놀라지 마세요. 형님. 일단 앉으셔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휴대폰 너머로 어렴풋이 들리는 고모의 떨리는 목소리.


"왜.. 어쩌다가? 어떻게 돌아가셨어?"


엄마는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다.

"방에서.. 목을 매다셨어요.."


고모의 탄식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진듯한 목소리.

"알겠어 올케.. 내가 다른 형제들한테는 연락 돌릴게. 오늘부터 3일장으로 했니? 그래 잘했다."


이제 할아버지의 자살을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

비밀을 함께하는 것은 끈끈한 연대감을 만들어준다.

이제 고모도 힘들어할텐데..

함께 힘들 사람이 한명 더 늘어났다.



여기까지 해결하고 나니 새벽 2시가 되었다.

분명 저녁 6시쯤 자다 깨 저녁밥을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었다니.


조금씩 실감이 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새벽이라 조문 올 사람들이 없을 것이기에 우린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할아버지의 닫힌 방 문.

현관에 있는 고양이의 화장실.

수북이 쌓인 고양이 밥.

뚱뚱한 우리 집 고양이 낑고.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아침 일찍 서류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다시 들려야 했고,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어야 했기에 우린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했다.

엄마, 아빠, 나는 다시 한 방에 모였다.

몇 시간 전 함께 낮잠을 잤던 그 방.

우리는 다시 그 방에 모여 잠을 청했다.


아빠는 침대에서 잠을 청했고,

나와 엄마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에어컨 바람이 춥게 느껴졌다.


바닥에 누워 눈을 뜨니 시계가 보였다.

새벽 3시구나.


잠깐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다.

새벽 3시구나.


눈을 뜨고 있다 보니 다시 스르륵 눈이 감겼다.

할아버지가 방에 아직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다.

새벽 3시 3분이네.


조금이라도 자야 해. 그래야 내일부터 장례식장에서 힘쓰지.

억지로 눈을 감았다.

침대 밑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렇게 말했다.

'너 할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랐지? 원하던 대로 됐네.'


다시 눈을 떴다.

새벽 3시 4분이었다.


다시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아니야. 할아버지가 정말 죽기를 바랐던 게 아니야. 아니야.'

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다시 눈을 떴다.

새벽 3시 6분이었다.


어느새 엄마와 아빠는 잠에 들었다.


눈물이 나질 않았다.

차라리 지금 슬픔에 젖어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나았을까.


금방이라도 누가 나를 해칠 것 같아.

두려워. 무서워.


새벽 6시가 될 때까지 분단위로 눈을 뜨고 감고를 반복했다.

할아버지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다.

자꾸 방에 매달려있는 것 같았다.

침대 밑에 누가 날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았다.


새벽 6시가 되니 알람이 울렸다.

샤워를 하고 우린 다시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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