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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목 Jun 12. 2023

하루만 바다로 도피할게요

퇴사하고 당일치기로 강릉에서 놀다 오기


 가장 가까운 바다, 혼자만의 영화관, 그냥 이끌리는 대로 해도 괜찮으니까 / 태연, 'weekend' 중


 혼자 국내여행을 하는 것이 좋다. 유명한 여행지 중 하나인 군산에서 나고 자랐으며, 대학 생활 또한 관광지인 전주에서 했던 덕분이다. 서울로 올라온 지금도 하루하루 여행온 기분으로 살고 있다.


 원래는 퇴사한 후에 여행을 갈 계획이 없었다. 당장 월급이 끊길 예정이니 그냥 도서관이나 카페를 오가며 이직 준비를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나의 계획을 들은 온갖 친구들이 만류했다. 조금은 쉬어야하지 않겠냐며. 귀가 얇은 나는 그들의 말에 넘어갔고, 강릉에 가는 KTX 기차표를 예매했다. 강릉은 지난해에도 혼자 다녀왔기에 이번엔 당일치기로 바다만 보고 오자고 결심했다. 바다 보러 갈 결심. 나의 목적은 오직 하나, 안목해변에서 '물멍' 때리기였다.


 퇴사를 하니 수면 패턴이 엉망이 됐다. 잠을 많이 자는 편은 아니지만, 새벽 3시에 자고 아침 8시에 일어났다가 저녁 7시에 저녁잠을 자고 자정에 다시 깼다가 잠드는 식이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 강릉으로 떠나기 전날에도 저녁 먹고 바로 잠을 자서 밤 열한 시쯤 깼다. 다시 잠을 자려고 시도해봤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고, 인터넷을 하다가 밤을 꼬박 새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 안에서 나는 황인찬 시인의 새 시집을 꼼꼼하게 읽고, 창밖을 보며 감상에 잠기고,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시집 조금 읽다가, 풍경 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다가, 옆에 앉은 아저씨가 김밥 먹는 소리를 듣다가(맛있어보였다), 결국 잠들었다. 강릉에 도착하기 5분 전에 눈이 떠졌다. 기차 안에서의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강원도의 녹음을 눈에 담으며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강릉역 옹막'에 들렀다. 회막국수도 먹고 싶고, 감자옹심이도 먹고 싶어서 두 개 다 시켰다. 어차피 당일치기라 숙박비가 들지 않으니, 음식에는 돈을 아끼려고 하지 않았다. 막국수와 옹심이를 시키면 식전 보리밥이 제공돼서 밥도 두 그릇이나 먹었다. 따뜻하고 쫀득한 감자 옹심이와 입맛을 돋우는 매콤한 막국수의 조합은 피곤이 싹 날아가는 맛이었다. 나는 옹심이와 막국수를 먹고 소화를 시킬 새도 없이 안목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바람의 세기도 적당했고, 햇빛의 온도도 훌륭했고, 하늘의 채도도 아름다웠다.



 해변에서는 돗자리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권여선의 신작 소설집을 재미있게 읽고, 파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햇볕이 너무 좋고, 내가 지금 해변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해서 그냥 가만히 앉아 해변을 바라봤다. 가끔 사진을 찍긴 했으나 많이 찍진 못했다. 세 시간 동안 앉아서 파란 바다를 보고 있으니 눈으로 명상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배영과 접영을 하는 외국인과 다정하게 사진을 찍는 연인들, 백사장을 뛰어 다니는 아이들. 이들이 모여 해변을 이뤘다. 그 풍경에 나도 포함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바다를 보고 난 후에는 해변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과테말라산 원두로 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바다를 조금 더 감상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내가 향한 곳은 이화국수였다. 장칼국수 하나와 김밥 한 줄을 합쳐 5000원. 맛있게 흡입하고 나와서 배니닭강정을 포장했다. 왼손에 들린 묵직한 행복의 무게.


 강릉에 와서 아메리카노만 마시다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카페106에 들러 시그니처인 태성커피를 마셨다. 이때가 다섯시 쯤이었고, 내가 예매한 기차표는 8시 반 차였다. 시간이 넉넉해서 한가롭게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이럴 수가. 맨 마지막에 들리려던 소품샵은 5시까지 영업이었고, 서점은 6시까지 운영이었다. 아. 이렇게 계획이 또 무너지다니.


 소품샵은 포기했고, 서점이라도 들리려고 서둘러 나왔다. 서점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20분, 택시로는 7분.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잡히지 않았다. 오늘 도합 3.5인분의 식사를 했으니 서점까진 경보로 걸어가야겠다, 생각하고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서 사고 싶었던 책 한 권과 친구에게 줄 선물을 샀다. 퀘스트 완료. 문제는, 기차 시간이 2시간 반이나 남았다는 것이었다.


 커피도 많이 마셨고, 음식도 많이 먹었고, 짐은 무거웠다. 다른 곳을 더 가지는 못할 것 같아서 바로 강릉역으로 향했다. 강릉역에 있는 투썸플레이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이때는 커피 말고 차를 시켰다) 새로 산 책을 읽었다. 내가 고른 책은 바로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 소설 '눈부신 안부'였다. 이 소설의 화자는 퇴사를 한 기자였고, 어머니가 독어교육을 전공했다. 나와 상황이 비슷해서 몰입하며 읽었다. 이런 눈부신 우연이 있다니!



 두 시간 남짓을 책만 읽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도 '눈부신 안부'를 계속해서 읽었다. 여행할 땐 꼭 그 지역의 독립책방을 들려 책을 한 권 구매하는데, 그곳에서 구매한 책이 마음에 쏙 들 때 정말 짜릿하다. '눈부신 안부'는 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책이긴 했지만 인터넷 서점이 아니라 강릉에서 구매한 게 신의 한 수인 것 같다.


 집에 오니 가방이 무거워서 어깨와 팔이 너무 아팠고, 바다에 앉아 있을 때 선크림을 안 바른 부위가 햇빛에 익어 따끔했다. 워낙 체력이 없어서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은 충만해졌다. 이번 달은 강릉에서의 기억을 품고 살아가야지. 그리고 마음이 힘들 땐 바다로 도피할 수 있는 여유를 잊지 않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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