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바라보며 자신의 세계를 직조해 간다.
하은은 나의 대학 동기다. 우리가 같은 과였던 시기는 일 년밖에 없지만, 대학교를 졸업한 지 2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짧지 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다.
하은의 취향을 조금 더 깊게 알게 된 건 대학교 4학년 때 가졌던 몇 번의 술자리에서였다. 영화와 문학,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곤 했다. 대화의 말미엔 우리가 괜히 철학과에 입학한 게 아니야, 같은 말들을 늘 하며 웃었다.
여러 길을 거쳐온 하은과 나는 현재 직장인이 됐다. 직장인이 되어 만난 하은은 여전히 사려 깊고, 명확하면서도 다양한 꿈이 있고, 밝은 성격을 지녔다. 하은과 나눈 이번 대화는, 사실 나 스스로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은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나를 덮고 있던 무언가가 걷히는 기분이 든다.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은목의 대학 동기이고, 여차저차 잘 살아가고 있는 장하은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하은 씨를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학창 시절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그렇게 봐주셨다면 정말 감사해요. 저는 탈선 같은 건 잘하지 않는, 어떻게 보면 성실한 딸이고, 학생이었어요. 그리고 자세히 보면 저의 주관이나 세계가 뚜렷하고 이런저런 꿈이 많은 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독서를 굉장히 좋아했고, 윤리 쪽에 고등학생 때부터 관심이 있었습니다. 헤르만 헤세, 괴테 등 가리지 않고 좋아했고, 고전문학 책들을 많이 읽으려고 했었어요. 만화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대학교 학부를 철학과로 결정했던 계기가 있나요? 주위의 반대도 있었을 것 같아요. 저는 철학과 간다고 하니까 진짜 모두가 말렸거든요. 그래서 철학과를 선택한 모두에게 동질감이 있어요.
의도적으로 지원하기도 했죠. 입시할 때 문턱이 조금 낮기도 했고, 저의 관심사랑도 맞았고요.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철학과에 갈 거라고 얘기를 많이 했었어요.
물론 반대가 많았지만, 저는 주변 목소리 때문에 결정을 바꾸진 않아요. 현실적으로 저의 역량에 대해 점검이 필요해서 결정을 바꿀 순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 결정의 잣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부모님이나 친척, 심지어 선생님도 특이하다고 생각해 주셨는데, 저는 '별거 아닌 거에 사람들이 진지하게 생각하네?'라고 느꼈죠.
하은 씨가 가진 철학이나 신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요? 너무 추상적인 질문이라면 좌우명도 좋아요.
어릴 때는 샤르트르처럼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진로라든지, 인생을 결정할 때는 샤르트르가 가장 큰 영향을 줬어요. 요즘 같은 경우는 ‘힘 빼고 살자’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는 원래 이것저것 하는 걸 좋아하고, 다양한 걸 해봤거든요. 그런데 도전을 100번 했을 때 100번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건 괜히 했다' 하는 것도 분명 있었어요.
(실패한 일에) 에너지를 많이 쏟았을 때 실망할 수 있고, 상처받을 수 있어요. 그런 것에 의미 부여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과거엔 사소한 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반대예요. 머릿속에 잡념이 사라져서 평온한 것 같아요.
제 직장 동료 분이 진짜 현재만 보는 스타일이에요. 과거와 미래는 상관하지 않아요. 그분은 진짜 현재를 즐겁게 살아요. 그분을 보면서 건강한 에너지를 많이 받았고 그분의 좋은 점을 닮고 싶기도 했죠.
1학년을 마치고 신문방송학과로 전과를 하셨는데, 신방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문화 콘텐츠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고, 그중에서 가장 멋있어 보이는 직업이 영화감독이었어요. '멋있는 직업을 가져야 프라이드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죠. 그러던 도중, 20살 5월쯤 학교 복도에 영화 워크숍 참가 모집 공고가 붙어 있었어요. 가슴이 두근거려서 바로 끌려갔죠.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이후로 전과를 결심하게 됐어요. 신방과도 영상, 스토리텔링 등 미디어를 배우는 곳이고, 저희 학교엔 영화 관련 학과가 없어서 들어갔어요. 신방과를 들어간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대학교를 휴학했을 땐 어떻게 지내셨나요?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어요. 휴학하는 동안엔 서울에서 지냈어요. 뭔가 제대로 하고 싶었거든요. 연기 쪽도 관심 있었고요. 전주는 영화 판이 좁아요. 큰 현장이 없고, 지역민들이 품앗이하는 시스템에 가까워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오면 다양한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상경하게 됐죠. 서울에서 두근두근하면서 지냈어요. 실제로 서울에서 현장 일을 많이 경험했고, 돈도 많이 벌어서 왔습니다. 하하.
저는 하은 씨가 갖고 있는 결단력과 추진력이 부러워요. 저는 생각만 하고 실현을 못할 때가 많고, 이 인터뷰도 머릿속으로 기획만 오랫동안 하다가 이제 슬슬 실현하는 거거든요. 하은 씨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책인 것 같아요. 집에 부모님이 사주신 책이 몇 권 있었는데 그중 정말 낡은 책이 있었어요. 성공담에 대해 풀어내는, 지금으로 따지면 자기 계발서 비슷한 거였죠. 어렸을 때 그 책이 너무 재밌었어요. 그 책에서 ‘너네 이 책 읽어도 할 사람 5퍼센트밖에 안 돼. 그러니까 그거밖에 안 되는 거야’라는 뉘앙스의 말이 있었고, 어느 정도 동의했어요. 도전을 안 하면 0% 이지 않나요. ‘하니까 진짜로 뭐가 되네?’ 하는 경험을 대학생활을 하면서 느꼈어요. 내가 가고자 하면 환경이 마련되는 법이거든요. 물론 무서웠죠. 저는 원래 외로움을 잘 못 느끼는 성격이고, 무딘 편이에요. 그런데 아무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건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어요. 현장에서 저의 가치관에 쇼크를 주는 일도 있었죠.
또 그때 현장에서 업계 톱들과 일을 했었는데, 그러면서 '나 진짜 부족한 점 많구나, 나 진짜 애구나. 나는 못하는 거 너무 많고, 왜 이렇게 어렵지?' 하는 생각, 특히 '어렵다'라는 감정을 강하게 느꼈어요. 많은 성장을 이뤘던 시간이었죠. 많이 아프기도 했고요.
'나 생각보다 겁쟁이네? 세상은 겁내야 되는 게 맞구나. 겁 없이 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리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인간 군상에 대한 정보가 많이 생겼어요. 사람에 대한 데이터가 급증한 거죠. 그 이후로 조금 더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애정을 많이 갖게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