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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철우 Apr 10. 2021

잠깐 전화할 시간도 없어?

비밀; 사랑할 때 감춰야 하는 마음들

사랑은     


당신이 일부러 놓아둔 돌맹이를 밟고 넘어지는 일이며

그마저도 일부러가 되는 일     


짧은 연극을 성공적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하루에 세 번 여자는 돌맹이를 놓아둘 자리를 봐둘 것이고

남자는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연습을 할 것     


각자의 배역에 충실할 것이며

상대에게 연기라는 행위를 들켜서는 안 되겠지만

그 속에서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     


당신이 좋다는 건

알면서도 속아주겠다는 약속 같은 것     


그럼에도 한 때 사랑한다 해놓고 한 번 아프다고 헤어지려는 것은 

떡국 먹고 나서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뱉으려는 것 아니겠나         


 

사랑은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이다. 극 속에서 두 사람은 큼지막한 배역을 맡게 되겠지. 주인공 같은 거 말이다. 임무가 막중한 만큼 성공적으로 극을 올리기 위해서는 배우가 완벽히 대사를 외우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지워야 한다. 아니 잊어야 한다. 웃는 표정, 말투와 사소한 습관까지 이전과 달라져야 하며 그것은 나의 것들이 아니라 주인공의 것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픽션이다. 수필이 아니라 소설이다. 누군가 사랑이 실재인지 허상인지 묻는다면 나는 허상이라고 답할 것이다. 연이어 이런 질문도 받게 되겠지. “그럼 철우씨는 연인을 사랑하는 척 연기하고 있는 건가요?” 그럼 나는 이렇게 답하게 되겠지. “맞습니다.”

 사랑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다. ‘첫눈에 반했어요.’ 이 뻔한 상황조차 사랑이 굴러 들어온 건 아니다. 당신과 마주치기 전부터 부단히 사랑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각본도 완성되지 않은 연극에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합을 맞출 상대 배우는 나타나지 않는다. 생각해보시라. 숨 쉬는 것만으로 힘들고 지칠 때, 언제 심장이 쿵쾅 소리를 내며 두 볼이 발그레 붉어지는 화학작용이 일어나던가. 사랑은 주인공들의 의지가 있을 때만 시작할 수 있는 거다. 오디션을 보러 오지 않은 배우가 캐스팅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의도적으로 짜여진 각본 속에서 시작되는 게 사랑이라면, 연인에 대한 애정이 연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숨겨야 될 이유는 또 무엇인지, 나는 좀 솔직해지기로 했다. 대신 배역에 좀 더 몰입하기로 했다. 내가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말이다.

 연기니까 사랑은 실수할 수 있는 거다. 연기니까 대사를 잘못 외워서 당신에게 상처 주는 말을 뱉을 수도 있는 거고, 연기니까 ‘컷’ 사인을 받을 때까지 노력할 수도 있는 거다. 모든 상황이 실재라면 우린 실수 하고도 실수 한 줄 모르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나는 반성하지 않을 것이고, 내가 잘못 했다는 당신의 지적조차 귀담아 듣지 않겠지. 연기니까 실수를 바로잡을 수도 있는 거다. 스크린 밖으로 나가, 주어진 ‘배역’이 아니라 ‘배우’의 입장에서 자신의 연기를 점검해보는 시간이 더 나은 사랑을 만들고 또 그 사랑을 지속시키게 한다.    


 삶에서 소중한 건 시간과 돈을 많이 들인 순서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 사랑이 소중하다면 사랑하는 이에게 시간과 돈을 들이면 된다. 이건 옷장만 열어봐도 알 수 있다. 신상품일 때 제값 주고 산 옷들을 절대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철마다 세탁소에 맡겨 드라이크리닝 시술로 광을 내고, 걸 때도 예쁜 옷걸이에 걸어둔다. 하지만 할인 폭을 크게 받고 산 옷들은 아무리 정가가 비싼 자켓이라 해도 딱 우리가 지불한 돈 만큼의 애정과 대우를 하더라는 거다.  

 하물며 옷도 철마다 관리해주는데, 일생에 몇 번 오지 않는 사랑을 만나게 되는 때 입지 않고 한구석에 자꾸 걸어두어서야 되겠는가. 그런 옷들에 곰팡이가 잔뜩 피더라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소매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부지런히 입는 옷에 곰팡이가 피는 법은 없다. 무심한 장마철에 야 잠깐 피어날 수 있겠지만, 균이 번식할 때까지 틈을 주지 않기 때문에 찰나의 실수로 옷을 버리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을 하려면 시간을 내야 한다. 함께한 시간 없이 사랑이 지속될 수는 없는 거다.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를 끊거나 함께 보내는 시간을 귀찮게 여긴다면, 그건 환기되지 않는 장롱 깊숙한 곳에 단지 예쁜 옷걸이에만 옷을 걸어놓고 방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을 관리해야 한다. 돈이 없다면 돈보다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라도 사랑을 관리해야 한다. 연인의 팔에 금팔찌를 매어주진 못하지만, 사실 사랑을 하는 때 우리가 바라는 건 길거리를 지나가다 파는 예쁜 실팔찌를 함께 골라주는 일이다. 서로 취향이 달라, 그녀가 고르는 것들이 도무지 예뻐 보이지 않더라도 감탄사를 내지르는 연기가 중요하다는 거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부분을 착시하니까, 사랑도 한 편의 연극이니까. 무대 위에서 배우가 선보이는 명연기는 청중의 박수를 이끌어내는 것처럼,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적절한 연기와 의도적인 노력은 마찬가지로 박수 받을 일이다. 

 사랑은 상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행위라서, 내게 사랑은 ‘시간’을 할애해서 당신 손목에 어울리는 실 팔찌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플리마켓 투어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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