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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할미 Apr 02. 2023

길례씨의 마지막 벚꽃놀이

 


불로동 오일장 날이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기도 전에 97세 친정엄마 길례씨가 나와 남편을 재촉한다. 며칠 전 이곳 사과 골짜기, 평광동 집에 행차하신 건 순전히 텃밭 때문이다. 분당 아파트에서 겨우내 손꼽아 기다려오신 텃밭 흙놀이. 온갖 채소 모종을 사다 심을 날인데 꾸물대는 딸과 사위가 못마땅해 자꾸 시계를 쳐다보신다.     


 장터에 도착하면 우선 먹고 봐야 한다. 단골 식당에 자리 잡고 앉아 얼큰 소고기찌개를 주문한다. 짜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길례씨의 취향 저격 메뉴다. “짜게 먹지 마세요.” “단 것 많이 드시지 마세요.” 따위의 아들딸 잔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 혈압약을 드시긴 해도 어느 때부터인가 엄마는 입맛 당기는 대로 먹을 자유를 획득하셨다. 순전히 나이 덕분이다.     


 이번이 대구 집에 마지막으로 오는 것이니 밥값, 모종값을 내겠다고 엄마가 선언하신다. 거의 비장한 표정이다. 나와 남편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    

 

 불로동 시장 초입부터 길바닥에 늘어선 모종판, 엄마 눈이 번쩍 뜨인다. 대뜸  상추 10개를 고른다. 남편은 케일이랑, 당귀 방풍나물 모종을 산다. 요즘 부쩍 약초에 관심이 많아진 1인이다. 옮겨 심을 어린 대파랑 쪽파 한 묶음도 산다.      


 고대하던 고추 모종은 아직 때가 일러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미리 준비해 놓으라고 사위에게 분부한 단감나무 묘목은 다행히 미리 사다 놓았단다.    

 

 다리가 아프다 면서도 지팡이나 보행보조기를 단칼에 거부하는 꼿꼿 길례씨, 느릿느릿 시장 한복판으로 진입한다. 찐 옥수수랑 햇감자, 손두부랑 당근, 양파를 산다. 생선은 아직 냉동실에 재고가 있어 어물전을 지나친다. 푹 삶아 껍질 벗겨놓은 시래기 한 묶음을 사면서 시래기된장지짐 레시피까지 듣는다. 상냥한 노점상 아주머니는 다시용 큰 멸치를 꼭 넣으라는 팁까지 제공한다. 마트에선 요거트를 산다.  

    

 엄마가 손목시계 배터리를 바꿔달라고 하신다. 사위와 함께 과일 노점상에 들르라 한 뒤 나는 큰길에 있는 시계 가게로 간다. 손목시계를 살피던 주인장은 “아니, 여기 바킹도 빠져버려 헐거운데 이걸 모르고 계속 쓰셨어요?” “오마나, 몰랐어요. 우리 엄마가 쓰시는 거예요.” “그럼 시장 한 바퀴 돌고 오쇼. 고쳐 놓을게요.”  

   

 다시 시장을 어슬렁거린다. 장꾼들을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 반찬가게와 육개장 가게도 줄이 길다. 하루나 겉절이가 반가워 한 봉지 산다. 민물고기 노점에서 미꾸라지랑 자라 구경까지  한 다음 시계가게로 간다.   

   

 “바킹도 새로 끼우고 배터리도 바꿨어요.” “감사합니다. 얼마 드리면 되죠?” “배터리값 3천원만 주세요.” “안돼요, 바킹도 새로 해주셨는데, 5천원은 받으셔야죠.”  “아닙니다. 3천원만 주세요. 그리고 어머니 잘 돌봐드리세요.”     


 나는 놀라 주인장 얼굴을 쳐다본다.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감동이다! 고개 숙여 인사한 후 그분의 건강을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주차장에서 남편을 만나자마자, 시계 가게 주인장을 칭송한다. 장날 나들이가 무사히 끝났다.   

   

 불로동에서 평광동 집으로 가는 길목은 그야말로 꽃대궐이다. 천연기념물 측백수림 지점부터 온통 매화와 벚꽃, 산수유와 목련, 개나리에 진달래까지, 동시다발로 피어난 봄이다. 봄꽃합창단의 공연을 보는 듯 황홀하다.      

 “엄마, 저 홍매화 좀 보세요. 색깔 죽이죠?” “응, 이쁘다. 근데 다음 장날에는 고추 모종이 나올라나?” “엄마, 꽃을 보시라고요, 꽃 말이예요.”      


 내가 꽃타령을 늘어놓아도 엄마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오로지 관심은 고추 모종이나 깻잎 모종이니. 우리 동네 꽃들은 97세 할머니에게 의문의 1패를 당한 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고무줄 바지를 갈아입은 길례씨, 즉시 호미를 들고 나선다.  사위가 삽괭이랑 쇠갈퀴로 미리 텃밭을 고르게 해놓은 터라 모종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당귀에 딸기 모종도 심고 내친 김에 글라디올라스와 리아트리스 구군까지 심는다. 엄마는 대만족한 눈길로 당장 물주기를 지시하신다.     


 나는 빽빽한 부추밭에서 몇 뿌리를 근처로 옮겨 심는다. 작년엔 부추밭을 잡초가 뒤덮었다. 햇빛을 거의 받지 못해 부추가 전멸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생존력 짱인 부추는 멀쩡하게 살아남아 올해 부추 부침개를 해먹는 즐거움을 준다. 부추겉절이랑 부추계란볶음도 텃밭 부추로 하면 더 맛있다. 계란탕이나 계란찜에도 부추는 요긴하다. 병충해도 적고 꽃도 아름다워 볼수록 기특하고 어여쁜 부추!     


 마당 벚꽃나무 아래, 길례씨가 혼잣말을 하신다. “이게 내가 보는 마지막 벚꽃이 되겠네.”나는 얼른 대답한다. “누구 맘대로? 엄마, 그렇게 말씀하신지  이미 10년이거든요.” 길례씨가  눈을 흘긴다. 모녀는 함께 웃는다. 엄마는 한동안 벚꽃나무 아래를 서성거린다. 봄꽃을 바라보는 그 눈길의 깊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가만히 지켜본다.      


 시래기된장지짐에 찐 옥수수로 저녁을 달게 드신 엄마,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드신다. 엄마를 보며 딸들은 자신의 미래를 선행학습하는 걸까. 나도 엄마 나이에 이르면 대봉 감나무를 심으라고 내 딸을 달달 볶아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말이다. 꽃보다 상추랑 고추 모종이 더 소중하다는 엄마, 이 위대한 경작 본능은 97세에도 결코 멈추지 않음을 본다.     


 엄마와 함께 한 달콤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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