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문 바다에는 당신과 나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사람이 없는 바닷가는 혼자 서서 바라보는 거울과 비슷합니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이란 눈 구경하기 힘든 남쪽 지방에 내리는 폭설 같은 것.
누군가 안부를 물어오면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 옥병에 간직했다고 전해주세요. 부디.
당신과 오니까 좋네요. 그 해 혼자 여기 왔었는데. 그 해 저는 나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길고 긴 지독한 터널에서 빠져나오려고 몇 백 장의 의미 없는 글을 써재끼고 수없이 울었던 듯해요. 그리고 날이 슬슬 쌀쌀해지던 11월 즈음에 여기 서 있었어요.
그전에는 늘 여행을 현실을 피해 도망가듯 갔었어요. 아무 준비도 없이 여행을 가면 그 날 하루, 그다음 날, 내 눈 앞에 다가온 일만 생각해야 하죠. 다음 날은 어디 가지? 어디서 자지? 배고픈데 어디 가서 밥 먹어야 되지? 돈은 얼마 남았지?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한국에서 나를 괴롭히던 문제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어요. 그게 좋아서 계속 갔었나 봐요. 내 손안에 내 눈 앞에 보이는 문제들만 해결하고 싶어서. 막연해 보이는 문제들은 외면하고 싶어서. 돌아오면 당연히 해결된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그걸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회피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한 동안 가고 싶어도 혼자 갑자기 짐 싸서 가는 여행은 하지 않았어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꾹 참아보려고 했죠. 그렇게 몇 년 지나니 막다른 길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도망도 해결의 방법 중 하나인데 그저 나쁜 방법이라고만 생각했었나 봐요. 그렇다고 울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었고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어요. 그 해 여름 울기 위해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건 아니지만 덕분에 울 수 있었고 도망도 방법 중에 하나임을 인정할 수 있었고 머릿속에서 같은 자리만 계속 돌고 있던 11살의 나, 16살의 나, 25살의 나들을 밖으로 꺼내 마주 할 수 있었어요. 그 전에는 낮잠을 잘 때마다 그 애들이 꿈속에 나와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는데 그 후로는 휴일 오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낮잠을 잘 수 있게 됐어요. 그렇게 머리를 비우고 나니 비로소 혼자 여행을 가보고 싶어 지더군요. 꽤 살만해졌었나 봐요.
그래서 가을이 더 멀어지기 전에 제주도행 비행기와 숙소만 예약해서 여행을 왔어요. 첫날 오후쯤 도착해서 맛집 두 개를 찾아갔다가 닫힌 문만 보고 숙소로 왔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그냥 숙소 앞 고기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고 살짝 의기소침해져서 어딜 갈까 하다가 갑자기 며칠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장필순의 노래 애월 낙조가 떠올라 버스를 타고 갈아타고 여기 왔었거든요. 걸어가는 동안 혹시나 해가 질까 얼마나 조마조마하며 버스정류장에서 바닷가로 뛰듯이 내려왔었는데. 다행히 딱 알맞은 시간에 도착해 해변 산책길을 걸었어요. 급하게 걷느라 살짝 차오른 숨을 고르며 잠시 멈춰서 눈과 목을 돌려 하늘과 바다를 둘러봤어요.
해는 아직 수평선 위에 넉넉히 떠 있어서 산책로에서 바라보니 따뜻하고 눈부셨지만 해의 반대편 육지는 이미 짙은 어둠이 져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어요. 낮과 밤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았어요. 해도 하늘도 육지도 내가 서 있는 앞도 뒤도 전부 다른 빛을 받고 있는 풍경들이 꼭 내 속 같아 두리번거리고 자꾸 뒤를 돌아보며 산책로를 걸었어요. 물론 아름답게 물든 노을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색이었지만 자꾸만 반대편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어둠이 조금 일찍 찾아온 풍경들과 그 풍경에 조금씩 사라지는 옅은 햇빛이 쓸쓸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사이로 하나 둘 나타나는 불빛들이 귀여웠고 따스해 보였어요. 그 전에는 바닷가에서 노을을 보면 언제나 해만 바라보고 그 뒤를 등지고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내 속도 그렇게 보려 했었나 봐요.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변하는 모습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혼자인 게 아깝더군요. '누군가에게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처음 해 봤던 것 같아. 에펠탑의 반짝이는 불빛을 볼 때도 앙코르 와트에서 해 뜨는 걸 볼 때도 좋다, 예쁘다고만 생각했지 혼자인 게 아깝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거든요. 에펠탑 앞에 커플이며 신혼여행 온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그런데도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애월에 와서 노을을 원 없이 보고 해가 쏙 들어가는 것도 보고 어둑어둑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걷고 예쁜 카페테라스에 앉아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파도 소리를 듣는데 아까웠어요. 여기 혼자 있는 것이. 이 공간과 시간과 색과 여기의 냄새와 소리를 한 삽 푹 떠서 지퍼백에 담아 뒀다가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 생각했었죠. 근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렇게 같이 와서 보면 되는구나. 바다도 해도 돌도 여기 그대로 있으니 당신과 오면 되는 거였네요. 이제야 이 좋은 풍경이 아깝지가 않네요. 당신과 같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