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비친 폭죽의 불빛을 바라보며

아는가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

by 알이





김연수 님의 청춘의 문장 중 좋은 문장을 옮기고, 읽고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밥을 지어먹고 해변에 놀러 온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원래 나는 늦게까지 잠자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때만은 잠이 쏟아져 내렸다. 자전거 여행이 주는 가장 좋은 선물이었다.


내가 황영조 마을까지 가서 본 것은 결국 내가 그 무엇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백 같은 시인도 될 수 있고 황영조 같은 운동선수도 될 수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君不見이라는 그 세 마디는 결국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아이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얘기였지만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을 즐겁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고행처럼 떠나려 했던 시절이 있었다. 떠났다가 돌아오면 무언가를 보고 깨닫는 바가 있어 돌아온 내가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던 때. 대학 3학년을 마치고서야 전공 공부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휴학한 나는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준비하는 동안 가서 견문을 넓히면 돌아와 마구 마구 영감이 떠올라 전공을 잘하고 하고 싶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돌아와 보니 그 두 달이 채 안 되는 시간이 바꿔 놓은 건 좀 더 쌀쌀해진 날씨와 텅 빈 잔고뿐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크게 상심한 모양이었는지 다음 해 지독한 우울증과 불안 속에 살다 또 갑자기 짐을 싸서 떠나고 싶어 졌다. 마지막 학기는 마무리하지 못하고 졸업 작품만 겨우 내놓고서는 돈이 마땅하지가 않아 태국 행 티켓을 끊었다. 그때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는지. 밤을 새워서 3달치 짐을 싸고 딱 3일 치 숙소와 여행 계획만 준비해 새벽녘 공항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이번에는 상황을 피하고 미루고 싶다는 생각에 떠난다는 건 확실히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다녀오면 내가 어떤 사람으로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서 뭘 보고 뭘 했던가. 계획도 없이 막연히 태국 가면 인도로 가는 싼 표를 구할 수 있다더라 인터넷 글만 보고 갔던 거라 여행책 하나 가져가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탈 정도로 햇빛 내리쬐는 길을 쪼리 신고 10kg 넘는 배낭을 메고 걸었다. 3일이 지난날부터는 그 날 숙소는 도착한 곳 여행안내소에 짐을 두고 돌아다니면서 방을 찾았다. 인도를 가기는커녕 바로 옆인 캄보디아나 베트남 갈 비행기 표 살 돈도 없어서 12시간씩 걸리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어떤 사람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루 걸러 하루 어디에서 자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무얼 먹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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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는 것에도 익숙해지던 1달쯤 지나던 어느 날 베트남 나짱 어느 바다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다가 내 기대와 상상들이 부풀려진 거대한 덩어리에 내가 짓눌려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듯하다. '나는 굉장히 근사한 뭔가를 이뤄야 할 사람 같은데 이렇게 형편없는 전공성적과 약해빠진 성정으로 길을 잃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각하며 나를 몰아붙였었는지도 모른다. 내 기대와 상상에 부응하기 위해서. 그 쳇바퀴에서 벗어나 하루하루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을 매번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더니 어떤 사람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따위는 역설적으로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런 건 생각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행을 온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보아야 할 것은 그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 만화에나 나올 법한 꽈배기 같은 걸음으로 호텔로 들어가서 화장실에 앉았다. 지사제도 하나 챙겨 오지 않았는데 밤새 아예 화장실에 앉아 있어야 할 정도로 설사를 했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난데없이 정전이 되었다. 나가서 묻고 싶어도 화장실을 벗어나는 게 두려운지 아니면 어둠이 무서운지 둘 다 인지 아무튼 나갈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어둠 속에 앉아 있는데 밖에서는 폭죽 터지는 소리와 환호성이 들렸다. 그 날은 12월 31일 그리고 1월 1일이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사실 그 폭죽 터지는 것을 보려고 멍 때리고 앉아 있었던 거였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내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났다. 고개를 들어 화장실 밖 어두운 방 안 침대 머리맡 벽을 바라보니 희미하게 불꽃에서 나온 색들이 비쳐 보였다.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다음날 6시간 타야 할 버스 걱정을 했던가. 무엇을 해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을 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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