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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튤 Oct 06. 2020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졌다.

제얄은 내 주변인들 중 가장 예술적이고 감각적인 사람이다. 최근 건강이 온전치 않은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이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 애가 먼저 연락하는 횟수는 적지만 한번 연락이 되면 요즘 잠을 잘 자는지, 약은 잘 먹고 있는지, 여전히 운동을 잘하고 있는지 등 내 삶을 꾸리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물었다. 그 애의 관심과 걱정 어린 질문에 나는 늘 응석을 부리게 된다. 어제는 이게 힘들었고 오늘은 이게 힘들고 내일은 이게 힘들 예정이야 하고 칭얼대면 그 애는 없는 말주변으로 내 기분을 열심히 북돋아준다. 어절과 어절 사이에 공백이 많은 것이 그 애의 말투인데 나는 그것이 참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한 건 꼭 입 밖으로 출력하고야 마는 나는 조금 수줍게 '상대방을 생각하며 말하다 보면 그럴 수 있겠다, 너는 정말 착한 사람이야'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약간의 침묵 후 제얄은 토하려는 얼굴로 딱 잡아뗐다.

"그냥 내가 어눌한 거야."


이제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지만 제얄에게도 아주아주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는 장기적인 우울증 약 복용으로 기억력과 총명함이 눈에 띄게 감퇴한 상태였다. 선잠을 자거나 아예 잠에 들지 못해 피부가 늘 창백한 회색 톤이었고 입술은 파리했다. 후 불면 흰 각질이 날릴 것처럼 바싹 건조했고 팔다리엔 힘이 없어 목각 인형처럼 삐걱거렸다. 제얄은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각하고 있던 듯했다. 그러나 그는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말은 한숨처럼 흩어졌고 울음을 먹어 삼키는 게 눈에 보였다. 난 그게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그가 애처로운 얼굴로 날 바라봐도 말로 해낼 때까지 도와주지 않기로 했다. 제얄은 어쩐지 상심한 듯했다.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의 여섯 시간 만에 핸드폰을 열어보는데 제얄에게서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제얄은 특별하지 않으면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스산한 기분에 여럿 전화를 걸었지만 수신음만 갈 뿐이었다. 나는 뒤늦게 카톡창을 열어봤다. 도와줘. 단 한 문장만이 4시간 전에 와있었다.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제얄에게로 달려갔다.

문을 열어젖혔다. 신발을 벗지도 않고 뛰어들어갔다.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뒤로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희미하게 기억하는 건 피로 범벅된 팔, 알아볼 수 없게 휘갈겨 적은 편지, 편지가 곱게 놓인 책상 옆에 어지럽게 누워있던 제얄의 모습뿐이다. 응급실에 갔던가? 아니면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던가? 119를 불렀던가? 중간에 숭덩 잘려나간 기억을 이어 붙이면 제얄의 가슴팍이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며 내가 엉엉 울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는 자신이 먹던 우울증 약을 뭉텅이로 삼켰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 난도질한 팔의 상처도 깊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제얄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제얄은 며칠 뒤에 깨어났다. 깨어나서 몇 마디를 웅얼거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지만 그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일이 끝나면 무조건 제얄 옆에 붙어 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는 마음으로 옆에서 땀을 닦아주고 부채질을 해주고 물을 마시게 도왔다. 제얄이 너무 조용하면 불안한 마음에 코끝에 손을 대고 그가 숨을 쉬는지 체크하기도 했다. 정신이 온전해진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에 특별한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우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해나갔다. 자주 웃었지만 종종 눈물이 차오르면 화장실로 달려가 샤워기를 틀어놓고 울었다.

몸에 남은 상흔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우린 천천히 붕대를 열고 소독을 했다. 상처는 끔찍했다. 손을 떨면 제얄이 아파할 테니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바보야, 이렇게까지 해놓을 필요는 없었잖아."

"너도 했잖아."
그는 내 팔의 담배빵을 향해 턱짓을 했다.
"내건 동그래서 귀엽기라도 하지, 이건 해괴망측해!"
그림 그리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제얄이 자신의 몸에 이런 것을 그려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타투를 해."
"좋은 생각이네."


이후 제얄은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타투 대신 피어싱에 관심을 갖는다. 기분이 저조할 때마다 귀를 하나씩 뚫더니 귓바퀴에는 더 이상 뚫을 곳이 없다며 눈썹과 코 피어싱을 알아보게 된다. 쿨하고 멋져 보여 제얄을 따라 양 귀를 뚫었는데 엄청난 통증에 피어싱은 포기하기로 했다. 숨을 참느라 얼굴이 새빨개진 나를 보고 제얄은 참을만한데, 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얄이 내게 살뜰한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내게 트라우마를 줬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것을 빚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제 그때의 빚을 갚겠다고 말했다.
"너도 내가 힘들 때, 도와줬잖아. 나도, 네가 살고 싶게끔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우리 죽지 말자."
나는 웃으면서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멋지게 살아남은 그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1년 하고 2개월 연상인 그를 그리 대했다간 곧바로 손절당할 것 같아 웃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우리는 시간이 맞으면 자주 만나 생존 신고를 했다. 물렁물렁한 우리를 근육맨으로 만들어달라고 빌며 고단백 식사를 하고 시내 일대를 활보하며 쇼핑을 했다. 제얄은 주로 피어싱을 샀고 나는 주로 운동용 레깅스를 샀다. 만날 때마다 제얄은 새 피어싱을 자랑했고 나는 단단해진 허벅지를 자랑했다. 리고 서로의 변화를 칭찬했다. 빚을 졌지만 미안해하기보다는 살아남는 것으로 갚자고, 나름의 방법을 모색하며 우린 오늘을 살아가고 오늘도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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