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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의 비율 이대일 Mar 19. 2019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

100년 동안 평생을 떠나고 다시 떠난 여인

 두 살 때부터 아장아장 집 밖의 길을 따라나서 부모를 깜짝 놀라게 만든 아이. 다섯 살 때는 파리 근교의 숲으로 나섰다가 가족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숲 관리인에게 발견되어 경찰서로 인계된 아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여름방학 때는 부모와 함께 머물고 있던 북해 근처의 휴양지를 떠나 혼자 여행에 나선 아이. 그리하여 두 발로 벨기에에서 네덜란드로, 이어 영국에까지 갔다가 제 집 프랑스로 되돌아온 아이. 열일곱 살 때 홀로 알프스 고개를 넘은 뒤 오래도록 이태리를 도보 여행했고 다음 해엔 자전거로 스페인과 프랑스를 돌아, 자전거로 프랑스를 일주한 최초의 여인이 된 사람.


 이어 1917년엔 마흔아홉의 나이로 일본을 경유하여 조선 땅 합천 해인사와 금강산을 돌아보고 유점사를 들러보기도 했던 여인.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를 배우고, 쉰다섯 살이 되던  1923년 10월엔 이방인의 방문이 금지된 땅 티베트로 도보여행을 시작, 중국의 윈난 성 서쪽에서 걸음을 뗀 후 남자로 변장하고 험난한 설산과 강을 두 발로 헤쳐 나간 여인. 인적 없는 산길에서 조난을 당하는가 하면 강도를 만나기도 하는 둥 상상키 어려운 위험과 고초를 감내하면서 3,200 킬로미터의 겨울 히말라야를 맨 걸음으로 이겨낸 여인. 그리하여 이듬해 2월, 기어코 라싸에 발을 들여놓은 용감무쌍한 여인. 여든두 살 때의 겨울에 해발 2240미터의 알프스에서 캠핑을 즐겼는가 하면 100세를 넘긴 후에도 티베트 방문 계획을 갖고 여권을 받아낸 강철 여인. 평생을 ‘떠났다’로 시작해서 ‘다시 떠날 것이다’로 끝냈다는, 진정한 철의 여인.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Alexandra David Neel ;1868~1969) 이야기다.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티베트의 존재를 알린 책이라는「티베트, 마법의 서」를 읽게 된 후 이 저자의 티베트 여행기가 이것보다 먼저 번역되어 나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곧바로 이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두툼한「영혼의 도시 라싸로 가는 길」을 한 숨에 읽어 내렸다. 어릴 때「15 소년 표류기」나「해저 2만 리」에서와 같은 흥분과 긴장감이 몰려왔고 20세기 초반부의 티베트 문화를 엿보게 된 즐거움이 한동안 가시질 않았다. 그러나 이 못지않게 흥미로운 건 100년 10개월이라는 인생의 대부분을 여행길에 쏟아부은 다비드 넬의 삶이었고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인생길을 걷게 만드는,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 (왼쪽에서 세번 째) Tibet

 대체 무엇이, 세상모르는 아기 다비드 넬을 길로 나서게 만든 것일까. 대체 무슨 마법에 걸려 그녀는 일생을 낯 모르는 숲과 들로 그리고 황야와 고원으로 나서게 된 것일까. 도대체 무슨 운명이기에 이 여인은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여행을 나서는 자신을 평생 후원해주는 ‘어리석을 정도로 이해심 많은 남편’을 만나게 된 걸까.


 기저귀나 떼었을까 말까 한 나이에 혼자 길을 따라나선 이 여인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와 비슷한 사례를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그것이 학자든 종교인이든 아니면 음악가든 운동선수든 특정 분야에서 우뚝 서게 된 이들은 대개가 어릴 적부터 자신의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세상엔 적잖은 수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끌리는 인생길을 따라나서고 평생 그 길을 걷다가 세상을 뒤로한다. <이는 마치 태백산 어느 골짜기에 떨어진 빗방울이 낙동강길을 따라 흐르기도 하고 서쪽길의 한강이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것은 저도 모르게 이끌려 결혼을 하게 되는 이성 간의 경우와는 달리 싫증을 느끼지 않는 인생길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엔 우리 인간의 뜻이나 의지라는 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여러 종류의 길 가운데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지만, 의지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가 제 인생길을 꼭 찾게 되는 것만도 아니어서 많은 이들이 특정 분야에 대한 흥미나 관심을 갖지 못한 채 단지 먹고살기 위해 전문 직업인의 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이것은 구멍이 여럿 나있는 목판과 구슬과의 관계와도 같다. 구멍 난 판에 구슬을 담아 흔들면 어떤 것은 일찍부터 구멍으로 빠져 들고 또 어떤 것은 나중에야 끼어든다. 그러나 여분의 것들은 마지막까지 그 어떤 구멍도 찾아들지 못하고 판 위를 떠돌게 되는데 이는 제 길로 쉽게 들어서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발전할 수 있고 성공의 가능성도 커진다고 말한다. 그런데 취미나 사람을 비롯하여 그 대상이 무엇이건 우리들의 호오(好惡)는 생래적인 것이다. 우정을 맺는 것도 그렇거니와 특정 이성에게 불현듯 끌리게 되는 것도, 말조차 나눠본 일 없는 이를 싫어하는 것도 우리의 의식적 선택에 따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백지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전생에 따른 것이건 아니면 부모의 기질이나 성격, 혹은 태내에서의 경험에 의한 것이건 인간은 저 나름의 자질이나 특성을 갖고 태어나며 평생 이를 반복해낸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주위에서 이런 유별난 사례를 접할 때마다 떠오르는 건 우리에게 과연 자유의지라는 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개개인의 삶은 모두가 특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그 누구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역사 또한 나름의 패턴과 수명 주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정 집단의 삶 또한 나름의 패턴과 흥망성쇠를 겪는 것이요, 다비드 넬의 인생처럼 특징적인 빛깔을 띄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汎神論)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은 “인간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별의 운동에서처럼 인과적으로 얽매여 있다” 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에게 “인간은 완전히 그리고 언제나 자유롭다.”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게 있을까? 정말 그럴까!


 다비드 넬은 「티베트 승려들의 비전(秘傳)」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티베트의 스승은 수행자에게 육체에 의해 움직여지는 물질적 활동과 끊임없는 그의 정신적 활동을 지켜보라고 가르치고 있다. 수행자는 자기한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수의 타인들이다. 이 <다수의 타인들>에는 물질적 요인들-배경이라고 말할지 모를-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은혜 입은 유산, 격세유전, 그가 섭취해 온 것들, 그가 태어 나기 전부터 흡입해 온 것들, 그의 육체가 형성되었을 때 받았던 것들, 그에 의해 동화된 것으로 그의 존재의 성분의 일부를 복합된 힘으로 타고나게 하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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