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나 곤충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인디언들에 따르면, 존중한다는 건 여기에 존재하는 대지와 물과 식물과 동물들이 우리 자신과 똑같이 여기에 머무를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책을 읽다 마주친 구절이다. 특히 발전과 경제라는 이름 아래 자연 파괴와 지구 오염이 극심해진 오늘날, 정말로 깊이 공감되는 구절이다. 그 언젠가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에서 순록 떼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도, 쿠션 양탄자 같은 지대가 석유 때문에 파괴되어가는 현실을 목도하여 심히 가슴 아팠거니와, 극히 우려되는 일이다. 더구나 이런 자연 파괴는 세계 도처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에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 모양의 현대문명이 무섭기만 하다. 아니 세계랄 것도 없다. 이 한반도 남한 땅만 하더라도 오지 구석구석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깔았는가 하면 산이고 강이고 할 것 없이 마구 훌쳐내고 파헤쳐 그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음은 우리가 익히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나 어릴 때만 하더라도 서울에 제비가 날아다니며 둥지를 틀었고 족제비를 본 일도 있다. 또 땅강아지를 만나 신기해했으며 낙산의 풀덤불에서는 깡총거리는 여치가 무척이나 즐거웠었다. 친구들이랑 물고기를 잡겠다고 미아리 고개 너머의 어느 개울을 찾아들었다가 종아리에 거머리라는 게 붙어 놀란 일도 있었고 동네로 날아든 잠자리를 잡겠다고 잠자리채로 허공을 헤집은 일도 있다. 무궁화엔 진딧물과 더불어 웬 풍뎅이가 그리도 많은 건지, 이것도 우리 집 근처의 무궁화 꽃을 보며 알게 된 사실이고 심지어는 친구가 잡은 하늘소를 본 일도 있다. 당시의 동물이나 곤충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런데 만물과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게 존중이라면 이를 파괴하는 우리 인간을 우리는 존중할 수 있을까. 공존을 거부하는 이들을 존중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이를 거부하는 이가 그 어떤 남이 아니라 현대 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바로 나 자신임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파괴를 단순히 특정한 이들의 소행으로만 볼 수 있을까. 정치든 경제든 아니면 문화든, 우리 인간의 집합적 활동은 필히 그 지반을 갖고 있는 법이니 이러한 파괴 행위의 근간은 바로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인구의 폭발적 증가다. 우리 인류가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내지 않는 한 건설이나 진보는 파괴와 퇴보라는 단어와 똑같은 의미를 갖게 될 뿐이다.
자연 존중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낭비적인 소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소비를 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검소라거나 검약이라는 단어가 죽은 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하여 소비가 더더욱 소비를 부추기는 악순환 속으로 빠져든 게 우리의 현실이다. 카메라만 하더라도, 렌즈로 보면 20세기 초반의 그것보다 나아진 게 별로 없어 보이 없건만 부단히 새로운 게 생산 소비되고 있으며 자동차든 전화든 아니면 가전제품이든 이 모든 게 끝없이 새로운 유행을 불러일으키며 쓰레기를 가속적으로 양산해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물건의 사용자가 아니라 소비자가 된다. 물건이 주인이 되고 나는 그 하수인이 되어 상품만을 좇아 다니고 물건에 붙들려 사는 셈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붙들고 살아야 할 건 이 지상에 피어난 숱한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요. 물성 아닌 영성의 성장을 위한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식물이든 동물이든 지상의 생물들은 우리 인간에게 “당신들은 우리처럼 여기에 머물 권리가 없다. 우리는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생물을 멸절시켜 왔는가.
지금도 하루에 130 종 이상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 하거니와 이는 우리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이기적이고 무분별한 태도 때문이다. 이에 열대 우림을 비롯한 세계의 숲이 엄청나게 사라지고 있다는데 이것이 매년 16만 평방 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더구나 열대우림지역은 지구의 허파로서 총 육지면적의 7%에 불과하나 여기에 지구 생물의 반수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이 바뀌면 모든 게 연쇄적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카오스 이론에서는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날씨를 바꿔놓는다. 마찬가지다. 생물 한 종이 사라질 때마다 그 연쇄 파급 효과는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을 뛰어넘는 문제가 된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무심히 브레이크 없는 길을 달려 나가고 있다.
촛불의 시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냉장고나 자동차 혹은 전화나 컴퓨터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한 척의 난파선을 타고 있으면서도 이를 백안시한 채 그저 음주가무만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목적지도 향방도 없는 배가 그저 빨리 내달아 가기만을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