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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공간에 세 개의 시간이

[단편] 연필깎이 소년 (4/4)

by 걍마늘 Feb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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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특별히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을 뿐이었다. 원래는 학원을 가야 했다. 기차로 치면 선로를 이탈한 것이다.

 

그런데 매일같이 지나던 길이 어쩐지 평소와 달라 보였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다. 그것은 화실 쇼윈도 안에 걸린 그림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림에 감탄해서만은 아니다. 누가 소년을 불렀고, 돌아보니 그림이 있었다. 또래의 소녀를 그린 인물 데생이었다. 그림이 소년을 부른 것이다.


그림을 그린 이는 소녀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있음이 분명했다. 연필로 그은 선의 집합에 불과한 그림에 그런 마음까지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소년은 건물로 들어가 슬쩍 화실 문을 열어 보았다. 모두가 조용히 자기 그림에 집중해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소년은 그들이 내뿜는 고요하지만 뜨거운 에너지에, 소리 없는 외침에 압도당했다. 느닷없이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입시를 준비하기에는 한참 늦었고, 시간도 많이 부족했다. 수능을 앞두고 취미로 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엇보다 수강료를 지불할 능력도,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원장을 붙들고 사정을 설명했다. 여기서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 가르쳐 달라지는 않겠다. 그릴 수 있게만 해 달라. 원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공부가 하기 싫은 건 아니겠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좋습니다. 다만 방해된다는 말이 들려오거나 문제가 생기면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두말없이 나가주셔야 합니다. 약속할 수 있습니까?”


소년은 학원 수업을 마치자마자 화실로 달려갔다. 학원은 빠지지 않았다. 독서실에만 가지 않을 뿐이었다. 독서실에 있어야 할 시간에 화실을 청소하고 그림을 그렸다. 부모님에게는 비밀이었다. 자정까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집에 들어가면 소년의 엄마는 굳이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다” 격려의 인사를 건네고는 그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나면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그림에 몰두했을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릴 때는 그림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그런데 여름 방학이 끝나고 본격적인 실기 대비에 들어가자 늦게까지 남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서로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자리가 부족해 자리를 차지하고 그림을 그리기가 애매할 때가 있었다. 그때 바닥을 굴러다니는 연필 하나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마침 연필심이 부러져 있어 커터 칼과 쓰레받기를 들고 화실 밖으로 나가 계단에 걸터앉았다. 연필을 깎으며 머리를 비웠다. 떨어낸 잡념을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 보니 생각보다 굴러다니는 연필이 많았다. 그렇게 한 자루 두 자루 깎다 보니 어느새 재미가 붙었다. 완벽하게 알맞은 연필심은 길이가 어느 정도고 뾰쪽함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보였다. 깎인 부분의 황금 비율은 얼마고, 경사각은 어느 정도가 가장 보기 좋은지도 알 것 같았다. 완벽한 연필이 주는 만족감이 상당해서 때로는 그림을 그릴 때보다 연필을 깎을 때의 희열이 더 컸다.


그러나 그림은 생각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처음엔 보이지 않는 마음 같은 것을 보이게 하는 작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웠다. 감추고 싶은 속내를 꺼내어 몰래 손에 쥐어주는 비밀스러운 일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한 형태로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고민과 수련의 시간이 요구되는 또 다른 문제였다. 재능을 포함한, 현실적인 문제는 하나도 고려되지 않은. 소년은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마다 연필을 깎았다. 연필은 모든 것이 명백했다. 연필로 찍은 점 하나까지도.


수능 당일이었다. 소년은 소년이 다닌 중학교에서 수능을 봤다. 개구멍이 어디 있는지도 잘 알았다. 그런데 1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개구멍이 있는 학교 담장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왠지 다 그만두고 싶어지는 것이다.


결국 개구멍으로 고사장을 빠져나왔다. 다들 일터에 있을 시간이라 더 썰렁한 주택가 골목을 지나 초록이 사라진 황량한 철길로 내려갔다. 아무래도 큰 사고를 치고 말았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소년은 증기기관차처럼 입김을 내뿜으며 선로를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굴다리가 나왔고 발길은 자연스럽게 화실로 향했다. 화실을 나서는 원장과 계단에서 마주쳤다. 계획하고 결심해서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일들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리고 이제 새드 엔딩을 앞두고 있었다.


소년은 원장과 함께 화실로 올라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원장은 질문 대신 우엉차를 내왔다. 우엉차의 효능 외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좋다고는 했으나 소년은 한 입도 대지 않았다.


“기회는 늘 옵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회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더군요. 기회인지 아닌지는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니까요. 노력해서 되는 일이 있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은 인생이라는 큰 그림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실패도 성공도 없는 법이죠. 죽음이라는 인생의 결말에 다다르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겁니다. 이번 일이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장은 더 있다 가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가져갈 게 있어서 잠깐 들렀다고 했다.


소년은 텅 빈 화실을 추억하듯 둘러보았다. 이젤에 놓인 연필을 집어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두 손으로 양쪽을 잡고 뚝 부러뜨렸다. 자신이 깎은 연필을 찾아내 모조리 두 동강 냈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오래된 팔레트 물감처럼 굳은 응어리를 풀 방법이 없었다.






“부러뜨렸다고요?”


소영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화가도 놀랐는지 연필을 놓쳤다. 연필이 때구루루 바닥을 구른다. 맑은 소리가 났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가 떨어진 연필을 주웠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던 것도 같아요. 그런데……” 깡통 안으로 연필을 던져 넣었다. 연필심이 부러졌는지 바로 새 연필을 꺼내 들었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연필을…….”


“잠시만.”


화가가 소영의 말을 끊었다.


“거의 끝났습니다. 딱 3분만 시간을 주시겠어요?”


그는 곧장 캔버스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곳은 블랙홀처럼 소리가 빨려 들어가고 시공간이 휘어질 정도로 밀도가 높아서 마치 세상의 가장자리에 와 있는 듯했다. 거리의 인파가 정적 속에서 물처럼 흘러간다.


소영은 눈앞에 상상의 캔버스를 세웠다. 우리는 사랑했지만 미워했고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리워했다. 서로 갖지 못한 것을 질투하고 서로가 가진 것을 시기했다. 그것은 줄리앙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그것은 소년의 연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자 하나의 공간에 세 개의 시간이 중첩되면서, 이를테면 르네 마그리트의 방식으로 한 장면에 세 가지 다른 세계가 담겼다. 서로는 알 수 없는 각자의 진실을 연필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다 됐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들고 일어섰다.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초상화를 받아 들었다. 초상화 속의 소영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여드리고 싶은 그림이 있어요.”


그가 아트백에서 캔버스 하나를 꺼냈다.


“얼마 전에 이삿짐을 싸다 발견했죠. 그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화실을 찾은 날이요. 화실을 나서는데 이 그림이 눈에 들어왔어요. 저를 불러 세운 그림이요. 다시 화실을 찾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훔쳤죠. 마침 초상화 일로 원장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돌려드려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에 그림을 들고 화실로 찾아갔습니다. 도둑질을 사죄하러 왔다고 했죠. 원장님은 아, 이 그림 하더니 오랫동안 그림을 들여다봤어요. 한참 만에 입을 여셨죠. 제게 의미가 되었다면 그림을 그린 사람에게도 큰 의미가 되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그림은 이미 제 역할을 다 한 거라고, 선물로 생각하고 간직해 주길 바라셨죠. 그러고는 자기가 아는 두 천재 소녀 얘길 들려주셨습니다. 그림은 그중 한 명이 그린 거라고 했어요.”


소녀가 그려진 캔버스를 건네받은 소영은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흐느낌은 자꾸 커지는데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화가는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그림 도구를 챙겼다.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지금이 오래전부터 꿈꿔온 바로 그 순간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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