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밤의 호랑이 (2/5)
집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고 아이스커피 두 잔과 아이들 음료와 간식으로 먹을 빵 따위를 샀다. 날씨는 맑음. 미세먼지는 좋음. 아직은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라 아침 기온은 활동하기 좋게 선선하다.
아이들이 앉은 뒷좌석 안전벨트를 확인했다. 자기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열한 살, 아홉 살 남매의 영역 다툼도 아직은 봐줄 만하다.
“얼마나 걸려?”
아들이 물었다.
“1시간 반?”
아들은 이내 순간이동을 하듯 태블릿의 세계로 빠져든다. 나는 항해를 앞둔 배의 닻을 올리는 기분으로 활기차게 시동을 걸었다.
“얼마나 남았어?”
이번엔 딸이 묻는다.
“방금 1시간 반 남았다고 했잖아.”
“그건 아까잖아.”
“그래, 그렇지. 음, 1시간 27분 남았네.”
한산한 도심을 빠져나와 수도권 순환도로를 탔다. 초록 들판과 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어우러진 목가적인 풍경이 서울에서 더 멀어졌음을 실감케 한다.
누가 그랬다. 어떻게든 서울에 붙어 있어야지 일단 한 번 서울을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굳이 서울에 붙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서 그래 하며 웃고 말았지만 그런 말을 들으니 내쫓기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적어도 서울에서는 반지하나 옥탑방도 어려웠다. 전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수입이 불규칙하니 월세도 불안했다. 여기다 싶으면 여지없이 돈이 모자라고 저기다 싶으면 어김없이 근저당이 잡혀 있었다. 공인중개사들은 하나같이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빚에 인생을 저당 잡힌 부모들을 보며 자란 덕에 대출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어찌어찌 대출을 받아도 어떻게 갚아야 할지는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우리는 낯선 동네를 헤매고 다니며 좌절하는 동안 자신이 인간 세상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뱃속에 아이가 없었다면 아마 결혼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정체 구간에 접어들자 아내가 노트북을 꺼내 무릎 위에 펼친다. 화학을 전공한 아내는 약품 관련 특허 문서를 번역했다. 늘 마감에 쫓겼다. 음악을 틀까 하다 방해가 될까 싶어 그만두었다.
말없이 지루하게 앞만 보고 달리다 얼마 전에 꾼 꿈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바나 티셔츠를 입었다. 어쩌면 일찌감치 무의식 속에 아바나 티셔츠가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꿈 때문에 일부러 꺼내 입은 것이 아니었다.
“가 보지 그랬어. 어차피 꿈인데.”
꿈 이야길 하자 아내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러게. 꿈속에서는 다른 사람이 돼도 괜찮은데.”
내비게이션이 과속을 경고한다.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브레이크를 밟았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하며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좌우 차로를 살핀다. 내 손에 네 명의 목숨의 달렸다. 아이들은 그새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꿈꿔 본 적 있어? 꿈이 깼는데 여전히 현실이 아니라 꿈속인 거야. 여전히 꿈인 줄 모르는 거지.”
아내가 탁, 노트북을 덮었다.
“나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어. 폭이 2미터쯤 되는 대형 캔버스에 그린 어둡고 하얀 겨울 숲이었지. 앞으로는 시내가 흐르고, 하늘은 짙푸른 새벽빛이었어. 그림이 아니라 커다란 통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같았어. 그런데 곁에서 누군가가 불쑥 묻는 거야. 귀에 익은 목소리로.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핀란드에 있는 자작나무 숲이에요. 숲 너머는 러시아고, 이곳은 10월부터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죠. 한겨울이 되면 오전 10시에 해가 뜨고 오후 2시에 해가 져요. 밤이 스무 시간이나 된다죠.”
아내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린다. 그는 다름 아닌 뮈다. 부스스한 머리에 나른한 눈매. 자유분방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가 뮈가 아닌 다른 누구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분명한 뮈다.
“얼마 전에 이곳에 가 봤어요. 일부러 찾아간 건 아니고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헬싱키로 가는 길이었는데 정차역 플랫폼에 이 그림이 그려진 안내판이 있었어요. 그때 열차에서 읽고 있던 책이 이거였는데.”
그가 책을 내민다. 똑같은 그림을 책 표지로 썼다. 모르는 작가의 소설이다.
“실제로 보고 싶더라고요. 무작정 열차에서 내렸죠. 플랫폼은 텅 비어 있었고, 아침이었는데 한밤중처럼 어두웠어요. 관광안내소에 가서 물어보니 국립공원 내에 있는 자작나무 숲이라더군요. 역 앞에 셔틀버스가 있었어요. 역에서 한 삼십 분쯤 걸렸나. 입장객은 저 혼자였어요. 출입구 옆에 자전거가 잔뜩 세워져 있길래 혹시나 싶어 팸플릿을 펼쳐 보니 공원 지도였죠. 무료 자전거로 공원을 돌아볼 수가 있더라고요. 상태 좋은 놈으로 골라잡아 타고 숲 쪽으로 달렸어요. 어둠이 걷힌 숲은 그림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신비한 느낌도 없고, 살짝 실망했던 것 같아요. 괜한 짓이었나 싶기도 했고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자작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같다. 관람객은 둘 뿐이고, 그와의 거리는 행여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걱정스러울 만큼 가깝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물가에 앉아 한숨 돌리는데 한 가족이 내려왔어요. 아버지가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 동안 아이들은 쌍안경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진지하게 숲을 관찰했죠. 자세히 들어보니 숲 속에 ‘나이트 타이거’라 불리는 하얀 호랑이가 산다는 거예요. 겨울이 되면 먹이가 부족해진 녀석들이 시냇가 근처까지 내려오기도 하는데, 크기가 표범만큼 작은데다 자작나무처럼 흰 털을 가지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더군요. 그들이 가고 나서 찬찬히 다시 숲을 돌아봤어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정말로 호랑이가 있는 것 같았죠. 보이지 않는 호랑이와 한참 동안 눈싸움을 했어요. 관광객이 많아질 때까지 그러고 있다 그 자리를 떴죠. 나가는 길에 매표소에 들러 그림에 대해 물어봤더니 여길 알려 줬어요.”
미술관은 벽면 전체가 투명한 유리라 실내지만 야외로 나온 기분이 들게 한다. 건물 밖으로는 숲이 우거져 있고 나무와 풀 들은 방금 비가 그친 듯 물기를 머금었다. 깨끗하게 닦인 유리 너머로 보이는 초록이 더없이 선명하다.
“한번 찾아봐요.”
아내는 홀린 듯이 그의 여행에 동참한다. 그와 함께라면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숲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그의 말대로 그림 어딘가에 호랑이가 있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보호색을 가진 밤의 호랑이는 빽빽한 자작나무 사이로 절묘하게 숨었다. 어려운 숨은 그림 찾기처럼 끝끝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인기척이 없어 돌아보니 그가 사라졌다. 호랑이가 아니라 자길 찾아보라는 말이었나. 다급히 그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미술관 내부는 미로처럼 복잡하고 헤매다 보면 결국 제자리다. 건물 밖으로 나갔을까. 그러자 이번에는 함부로 벗어 놓은 신발 무더기가 아내를 막아선다. 바글거리는 도서관 어린이 열람실 앞 같다. 그런데 무얼 신고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신발을 찾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신발의 개수가 불어났다. 그래서 급한 대로 아무거나 신으려는데 이번에는 짝이 맞는 신발이 없다. 죄다 한 짝뿐이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신발들이 일부러 훼방을 놓는 듯하다. 그제야 꿈이구나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