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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잇터 Jul 07. 2024

죽기 전, 라멘 한 그릇에

밥은 1/2공기만 추가해주세요

누군가 만약에 '죽기 전에 어떤 음식을 먹을래?'라고 묻는다면 제 답은 언제나 "세상 찐한 돈코츠 라멘에 밥 1/2공기" 입니다. 라멘, 그 중에서도 돈코츠 라멘에 대한 제 애정은 특별합니다. 

라멘을 처음 먹어본 건 22살 이후 입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에게 일본인 친척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를 자주 라멘집에 데려갔습니다. 국물 안에는 뜨겁게 달군 돌멩이가 들어가있고, 가게 안에는 원피스나 드래곤볼 피규어가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대학생이 되어 새로운 음식을 먹어본다는 설렘이 컸지, 라멘 맛에 대한 임팩트는 크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게 일본에서 먹는 국수겠거니 하고 먹었지요.


죽기 전 먹어야 하는 음식이 라멘 한 그릇이 된 계기는 처음 홀로 떠난 해외 여행이었습니다.  

2018년 3월 저는 아무런 계획 없이 홀로 오사카로 떠났습니다. 출발과 돌아오는 티켓 딱 2장이 계획의 전부였습니다. 덕분에 모든 게 우연과 찰나의 연속이었습니다. 교토에 갔다가 들렀던 미슐랭 장어 덮밥집, 시장 구경을 하다가 먹은 마구로동, 목욕을 끝마치고 먹었던 오리 소바, 그리고 그 소바집에서 만난 초등학교 선생님과 저녁에 먹은 오코노미야키. 그리고 정처 없이 길을 걷다가 세븐 일레븐 옆에 있던 조그만 라멘 가게에서 만난 운명의 라멘 한 그릇. 그 가게엔 한국어 메뉴판은 없었습니다.'이치란 라멘'에 가지 않고 여길 온 한국인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듯한 일본인과 당황한 사장님도 있었죠. 주문도 어려웠습니다. 자판기에 돈을 넣고 식권을 뽑아 사장님에게 직접 건네야했죠. 가장 좌측 상단,그러니까 가장 첫번째 버튼이 기본 메뉴 혹은 시그니처 메뉴일거라는 판단에 그걸 골라서 사장님에게 건넸습니다. 흰 두건을 두르신 사장님은 제게 뭔가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애써 어색한 웃음만 지어보이는 저를 뒤로하고 다시 주방에 돌아가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받아든 건 묵직하고 진한 색깔의 라멘. 

홍대에서 먹었던 찰랑 거리는 국물과는 점성,점도 자체가 달랐습니다. 마치 수프 같았죠. 아니다, 푹푹 빠질듯한 늪과도 같았습니다. 색깔은 누르스름했고 기름이 둥둥 떠있었습니다. 조심스레 한 숟 갈 떠먹었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그 진하디 진한 국물과 돼지 기름은 제 입 안을 에워싸고 식도를 코팅하며 쭈욱 미끄러져 내려갔습니다. 목 어디에선가 자글자글한 느낌이 들었고, 위는 순식간에 따따하게 데워졌습니다. 어디에서도 맛 보지 못했던 그런 진함에 온 몸이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한 젓가락 들어올린 면발에도 '국물'이 찐득하게 달라 붙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반 그릇 뿐 먹지 못했습니다. 제 그릇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진함을 감당하기엔 전 아직 너무나 한국인이었죠.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뒤에 그 라멘 맛은 쉬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라멘 반 그릇에 저도 모르게 라멘 마니아가 되고 말았던 것일까요. 좋았여행의 기억만큼 그 '수프'깊이와 인상 또한 아주 깊었죠. 당장 오사카를 갈 순 없으니 한국에서 유명한 라멘 가게를 전부 가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 맛을, 그 감동을 다시 한 번 느껴 보고 싶어서요. 2018년에 시작한 돈코츠 라멘에 대한 애정은 햇수로 7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오사카에서 먹었던 국물만큼 진한 곳은 찾지 못했습니다만, 그 새 한국 라멘집도 꽤나 치고 올라왔습니다. '기본빵(?)' 그 이상 하는 곳이 꽤나 많아졌죠. 덕분에 라멘 덕후인 저는 행복합니다. 갈 곳이 많아졌으니까요. 


무계획과 우연으로 이루어진 여행 속에서 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해줬으면 하는 한 그릇을 만났습니다. 

블로그나 유튜브 후기를 보고 관광객들이 많은 곳에 찾아갔다면 아마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 속 무계획과 우연의 힘을 강력하게 믿습니다. 또 다른 인생의 라멘 한 그릇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말이죠. 새로운 경험과 발견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연은 곧 필연으로 이어진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그 진한 라멘 국물을 다시 맛보며, 제 인생도 그만큼 진하고 깊었다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인생의 그릇을 바꿔놓은 라멘 한 그릇. * 위치 미상. *가게 이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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