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맛은 컵에서 시작
저는 SSAP INFP입니다. 감정기복이 아주 심하죠. 사소한 일에도 온 신경이 가는 고라니, 툭 던진 말에 가끔은 기절하는 개구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올빼미 같은 사람입니다. 특히 일이 몰리는 시즌에는 스트레스라는 놈이 무서워 잠은 저만치 달아나고 숨어버리죠. 그런 제 성격을 다스리기 위해서 저는 다양한 루틴을 정해놓았습니다. 집 안을 밝히는 불빛은 오로지 이케아에서 9만2천원 주고 산 조명 하나이고 캐모마일은 100개들이 한 박스로 사놔서 밤마다 마십니다. 그리고 밤잠을 위해 커피는 오전에만 마십니다. 제가 보통 8시부터 활동을 시작하니 제게 커피가 허락된 시간은 단 4시간 뿐인거죠.
용량은 딱 1잔에, 에스프레소도 맥시멈 2샷으로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한정된 시간에만 마실 수 있는 음료이다보다 가장 맛있게 즐기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원두별로 공부를 하고 직접 내려서 먹냐고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선물 받은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을 사용하고 다크블렌드 되어 산미가 없는 커피면 다 맛있게 마십니다. 중요한 건 컵입니다. 그 날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건 단지 하나 컵입니다.
크로우 캐년에서 산 알록달록 가벼운 법랑 컵인지, 제주도 스타벅스에서 산 투명한 CITY 머그인지, 바스키아 전시회에서 산 길다란 도자기 컵인지에 따라 커피의 맛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제 기분도 달라집니다. 아침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나서 서는 곳은 다름아닌 컵 선반입니다. 경기 전날 선발 명단에 어떤 선수를 기용할 것인지 고민하는 감독의 기분이 이런걸까요. 오늘의 커피는 어떤 컵에 담아 마시는 게 맛있을까 이 컵 저 컵 만지작 거리다가 냉큼 하나를 집어듭니다.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아내고 그제서야 에스프레소를 내립니다. 갓 나온 커피가 담긴 잔을 코에 가까이 대고 초콜릿향 혹은 견과류 향을 깊이 폐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커피 향만으로도 잠이 깨는 듯합니다. 에스프레소를 오늘의 컵에 붓습니다. 밤새 얼어있던 얼음이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면 젓가락 하나를 비장하게 뽑아들고 마구 원을 그리며 섞어냅니다. 얼음의 차가운 기운이 커피에 아주 잔뜩 퍼집니다. 마무리로 생수를 살짝 부어줍니다. 얼음이 녹으며 맛의 밸런스를 잡아줄 거라 너무 많이 넣으면 향이 무뎌질테니까요.
콧 속에는 진한 초콜릿향, 귀에는 짤랑 거리는 얼음 소리, 눈으로는 오늘의 아티클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직도 자신이 차갑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컵 표면에 물기가 맺힙니다. 그 정도가 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됐다는 뜻입니다. 남은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습니다.
자신의 냉기를 다 써버린 얼음은 꼬맹이가 되어서 컵에 남아있습니다. 입이 심심할 때 아이스 캔디라고 생각하고 입 안에 데굴데굴 굴리고 아그작 씹어 먹으면 또 그만한 맛이 있습니다.
좋은 유소년 선수를 영입하는 스카우터처럼 매번 새로운 컵들을 영입한 덕분에 집 안에는 온통 컵입니다. 설거지의 최소 50%가 컵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컵을 사는 건 꽤나 중요한 일입니다. 제 하루를 어떤 기분으로 시작하고 얼마나 좋게 시작하는지가 달려 있으니까. 게다가 기분 좋은 하루 시작은 인생 전체에 있어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계속 사는 건 경제학적으로, 정리학차원에서도 좋지 않습니다. 대신 저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컵을 선물합니다. 제가 써보고 싶었던 컵 혹은 어딘가에 담아뒀던 컵들을 선물합니다. 제게 컵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 굳이굳이 설명까지 덧붙이죠. 퇴사하는 사람에겐 '또 다른 시작을 응원할게요' 라던지 생일인 사람에게는 '좋은 것만 담기는 하루가 되기를 바랄게요' 라면서요. 그 덧붙임과 함께 받은 컵으로 무언가를 마실 때 그 사람에게도 컵이 제게 가진 의미가 전염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