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시카이로 방문기
나가사키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한적하고 조용하다. 항구 도시답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습기와 바다 냄새가 은은하게 퍼진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뿐이다. 원자폭탄 박물관 방문, 야경 감상, 그리고 나가사키 짬뽕 완뽕.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트램을 탄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나오는 것처럼 도로 한가운데에 기차가 다닌다. 아주 조그만 한 칸짜리 기차. 가는 방향을 확인하고 요금을 지불한 후, 일본인 학생들과 아주머니들 사이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일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다케오에서 느꼈던 자유와 해방감이 다시금 떠오른다. 긴장이 풀리고 몸이 이완되면서 작은 풍경 하나에도 행복을 느낀다. 이게 진정한 여행의 맛이 아닐까
트램은 금세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역사와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한 나라 출신인 만큼, 그 이야기가 단순한 정보로 다가오지 않는다. 가슴이 아프다. 무고하게 희생된 조선과 일본 시민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가벼워진 마음에 쿵하고 철덩이가 내려앉는다. 내가 늘 바라는 마음의 평화만큼, 이 땅의 평화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복잡한 마음에는 걷는 것이 최선이다. 무덥고 습하지만, 포카리 스웨트를 한 병 들고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본다. 새로운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배고픔이 밀려온다. 숙소에서 쉬려던 계획을 접는다. 지금이 나가사키 짬뽕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식당을 향해 걷는다. 나가사키 짬뽕이 처음 만들어진 원조 나가사키 짬뽕집, "시카이로"로 향한다.
식당 건물은 높고 거대하다. 마치 장사가 잘 돼서 여러 층으로 확장한 코리안 갈빗집 같다. 코앞에 두고도 이게 맞나 싶어 구글 지도를 다시 확인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식당과 바로 연결된다. 식사 시간을 피해서인지 사람이 많지 않다. 덕분에 바다가 보이는 창가로 안내받는다. 혼자 여행의 유일한 단점은 다양한 음식을 시킬 수 없다는 것. 고민할 것도 없이 나가사키 짬뽕 한 그릇을 주문한다.
묵직하고 뽀얀 짬뽕 한 그릇. 내가 알던 나가사키 짬뽕과 비슷해 보이지만,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하지 않는다. 국물을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신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진하고 걸쭉한 국물은 마치 두유 같기도 하고, 끝에서는 돈코츠 라멘이나 해물 베이스의 바디감이 느껴진다. 이번엔 면을 들어 올린다. 두껍게 쌓인 토핑 아래서 중면과 해물, 양배추가 함께 올라온다. 점도가 있는 국물 덕분에 면도 따로 놀지 않는다. 국물과 면이 하나가 된 이 순간, 진정한 국물아일체를 경험한다. 코를 박고 먹는다. 그 시간대 손님들 중 내가 가장 맛있게 먹었으리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완뽕이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든 걸 내 안에 집어넣었다. 창밖의 넓은 바다를 잠시 바라보며 숨을 고른다. 만족스럽다.
나가사키 짬뽕, 한국인이라면 어디서든 한 번쯤 먹어봤을 것이다. 이자카야에서 뜨끈한 국물이 필요할 때나, 하얀 국물 라면 전쟁 중 삼양이 꺼내든 나가사키 짬뽕 라면을 말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나가사키에서 원조 나가사키 짬뽕을 먹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는 그중 한 명이 되었다. 괜스레 뿌듯하다. 내 음식 도감에 나가사키 짬뽕이라는 새로운 음식을 추가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다시 나가사키에 올 일이 있을까? 언젠가 다시 이곳에서 이 한 그릇을 맛볼 수 있을까? 그저 바랄 뿐이다. 일본 여행이 대중화된 이후 돈코츠 라멘이 상향 평준화된 것처럼, 나가사키 짬뽕의 맛도 널리 알려져 제대로 만드는 식당이 서울 근처에 생기길. 저녁부터는 비가 쏟아져 해무가 잔뜩 끼어 야경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크게 아쉽지 않다. 전망 대 위에서도 짬뽕 한 그릇의 기름과 여운이 입 안에 가득 남아있었으니까. 이 한 그릇만으로도 나가사키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행을 떠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잊지 못할 나가사키 짬뽕 - 시카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