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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핑계 대지 마, 키 핑계 대지 마

2025 동아 서울마라톤에 대한 단상

by 임오션 yimOcean Mar 28. 2025

 지난겨울은 당연하듯 추웠다. 2월 말 잠시 따뜻해지나 했지만, 여지없이 꽃샘추위는 송곳처럼 솟았다. 나는 그래서 사무치게 에이는 바람과 흐린 해를 핑계로 바깥 러닝을 피했다. 찬 공기를 뚫고 다리를 구르기에는 집 안 공기는 너무 안락했다. 그렇게 삼 개월이 지나가니 봄이 오기는 오나 보다. 경칩이 지나가니 기온보다는 미세먼지 수치를 우선 따지게 되는 게 바야흐로 봄이라는 반증인 것 같다.


 2025년 마라톤의 시즌 또한 시작되었다. 마라톤 봄시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3월 중순에 열리는 ‘동아 서울마라톤’이다. 풀마라톤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혹한기 훈련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회이기도 하고, 세계육상연맹(WA)이 인정하는 국내유일의 플래티넘 등급 마라톤 대회이니 말이다.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해 동대문, 광진구를 거쳐 잠실까지 이어지는 자동차 도로를 뛰어볼 수 있다는 점 또한 러너들에게는 매력적이다. 올해에는 4만 명이 참가했다. 국내 대회 중에서는 최대 규모라는데, 이것도 지난 6월에 접수가 이미 마감되었다. 치열한 접수경쟁에 손이 느린 어르신들은 접수를 하지 못했고, 뒤늦게 러닝재미에 빠진 사람들은 접수할 기회마저 놓치고 말아 원성이 자자했다. 그 정도로 러닝붐은 대단하다.




*마라톤 현장에는 누가 누가 있을까

 마라톤대회 현장에 참여하는 일반 시민들은 크게 두 부류다. 직접 선수로 참가를 하거나, 자원봉사를 하거나. 자원봉사를 할 경우 일정구간마다 제공되는 급수 또는 간식을 준비하고 주로를 안내하거나, 코스 내에 떨어진 쓰레기와 종이컵들을 청소하고, 주자들이 맡긴 짐을 찾거나 정리하는 일 등을 한다. 자원봉사를 하면 다음 해 대회의 우선 참가권을 주기 때문에 올해 참가 신청을 못했거나, 부상 등의 이유로 한 해 ‘쉬어갈 결심’을 한 러너들이 전략적으로 지원하기도 한다.


 대회에서 뛰지도 않고 자원봉사도 않는 사람들은 길에서 응원을 한다. 42.195 Km와 싸우고 있는 가족, 친구, 또는 일면식 없는 참가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도 속하지 않는데 우연히 그 현장에 있게 되는 사람들은 ‘이까짓 마라톤 대회가 뭐길래 도심을 통제하고 난리냐’ 라며 짜증을 낸다. 교통통제 업무를 하는 경찰들은 그 과정에서 애꿎게 짜증을 받아내는 역할을 한다. (감사합니다..)




*TV에는 누가 누가 나올까

 나는 대회현장에 없었다. 대신 집에서 TV를 켰다. 나도 몰랐다. 두어 시간 동안 마라톤 대회 중계를 쳐다보게 될 줄이야.


 TV중계는 크게 네 그룹으로 나뉘어서 중계되었다. 엘리트 선수들의 시상을 고려한 그룹이었다. 국제부 오픈 남자, 국내부 오픈 남자, 국제부 오픈 여자, 국내부 오픈 여자 그룹별 선두권을 중심으로 화면을 순환하며 송출해 줬다. 국제부 오픈 남자부는 에티오피아와 케냐의 각축전이었다. 너무 예상한 대로라 조금 심심했다.


 재미있는 그룹은 따로 있었으니, 국내부 오픈 여자그룹의 중계였다. 달리고 있는 선수들이 다 낯이 익었다. 선발로 달리고 있는 여자 선수 두 명은 러닝 유튜브들에서 이번대회 유망주로 점찍었던 엘리트 선수들이었고, 그들과 같은 페이스로 달리고 있던 남자 선수들은 엘리트 선수는 아니지만 유명한 인플루언서들이었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라는데 매달 800 km 이상을 뛰는 동호인 선수, 응급실 간호사직을 관두고 이번 대회에 올인한 또 다른 동호인 선수 등 SNS와 유튜브에서 봐오던 인플루언서들의 경기를 TV중계 화면으로 보니 아는 사람이 나온 것 같고 몰입이 되는 거다.




 *TV로 송출된 하필 그 짤

 그런데 국내부 오픈 여자그룹의 화면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나왔다. 그룹 내에서 같은 페이스로 뛰고 있던 남자 마스터즈 (아마추어 동호인) 선수 A가 본인이 마시던 물병을 버리는 과정에서 앞서 달리는 주자 B의 다리에 맞고 튕겨 나와 바닥에 떨어졌고 그 병을 발로 쳐내는 과정에서 또 다른 주자 C의 다리에도 맞아버린 것이다. A 선수 자체도 유명한 인플루언서인 데다가, 일련의 모든 상황들이 TV 중계화면에 고스란히 송출되는 바람에 밈으로 박제되어 버렸고, 온갖 커뮤니티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옆에서 1위로 달리던 여자 엘리트 최경선 선수도 깜짝 놀라 펄쩍 뛰며 욕하는 장면까지 같이 잡힌 터라 엘리트선수에게 아마추어가 무례하다느니 물병으로 몇 명을 나락을 보내려냐는 둥 비난을 받으며 A는 갖은 조리돌림을 당하게 된다.



*키 핑계 대지 마

 국내부 오픈 여자 그룹에서 계속 1위로 달리던 최경선 선수가 41km를 넘어서면서 페이스를 잃기 시작했다. 본인 신기록을 세우기 위해 밀어붙인 페이스가 독이 되었던 건지, 경기 후반에 괴로워하며 주춤거리는 동안 2위로 달리던 임예진 선수가 따라붙기 시작했다. 2위 선수의 막판 스퍼트에 경기 흐름은 역전되어, 결국 추월한 선수가 1위로 들어왔다. 작년에 이은 임예진 선수의 2년 연속 우승이었다. 피니시테이프를 끊자마자 도로 위에 발랑 누워버리는데 왠지 그녀의 몸 비율이 친근해 보인다. 사진기사를 검색해 보니 키가 상당히 작다. 151cm. 이건, 나보다도 훨씬 작잖아.

 그전까지 1위로 달리던 최경선 선수는 신장이 167cm이다. 151cm의 키로 추월을 하고, 2시간 30분 만에 42.195km를 달리려면 얼마나 빨라야 할까. 얼마나 노력했을까. 심지어 이 선수, 갑상선암을 치료하면서 훈련했다고 한다. 단신뱁새가 면죄부라 생각했던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이 얼마나 갸륵하고 비겁한 변명인가. 나는 그냥 인간 자체가 약한 것이었다.(aka. 인자약) 엄한 핑계 대지 말자.

(좌) 임예진 선수 151cm (우) 최경선 선수 167cm


 봄시즌의 하이라이트라고 불리는 동아 서울마라톤. 또 어떤 이는 올해 마라톤의 시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로 봄과 가을에 걸쳐 크고 작은 마라톤 행사들의 줄줄이 대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찐 러너들은 하프마라톤 이하, 즉 10km 나 5km 달리기에는 감히 '마라톤'이라는 칭호를 붙여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름 따위 뭐가 중할까. 마라톤이든 달리기든 간에 다들 자기 짐 질만큼만 지고 달리는 건 매한가지 아니던가. 지금 10킬로 달리다가 숨이 트이고 몸이 재발라지면 언젠가 풀마라톤 뛰는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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