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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ri Dec 31. 2021

우주피스 공화국

모든 사람은 게으를 권리가 있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취향이 나와 비슷하거나 생각이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극대화된다.

눈이 오락가락하는 날 종일 우주피스(Užupis Respublika)를 쏘다니다가 앞으로 더 많이 리투아니아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뭐 아직은 짝사랑 정도이지만 이 나라 살면 살수록 매력적이다.      

우주피스는 빌뉴스 구시가지 동편에 있는 작은 마이크로네이션이다. 매년 4월 1일 만우절에만 단 하루 정말 존재하는 국가가 된다고 한다.

빌뉴스 올드타운에서 강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박한 Vilnia 강을 건너면 우주피스로 바로 연결된다. ‘우주라는 한국어를 의미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름부터 신기한  지역을 한참 전부터 오고 싶었더랬다. 시간이 없어 미루다가 학기가 마무리되고야 눈을 맞으며 Vilnia강을 건널  있었다.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엔 역시나 세계 공통의 사랑의 징표인 자물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빌렐레 강을 건너면 보이는 우주피스입구
성물을 파는 장소 같기도 한데 창밖으로 보이는 사제
돔을 지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우주피스는 인터넷을 찾아보니 예전엔 유대인 집단 거주지였고 빌뉴스 내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가 예술가들이 모여 살면서 지금의 우주피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언덕길을 따라 줄줄이 만나게 되는 공방과 갤러리들이 경리단길도 연상시키고 몇백 년 된 건물의 돔을 지나 만나게 되는 상점들이 을지로 뒷골목을 닮은 듯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 이 사람들 뭐지?’ 하며 나를 ‘심쿵’하게 한 건 우주피스의 헌법이었다. 2018년에 내 걸렸다는 한국어 헌법 앞에서 한참을 서서 헌법을 읽었다. 모든 사람은 게으르고 실수할 권리가 있다니... 귀엽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1. 모든 사람은 빌넬레 강변에서 살 권리를 가지며 빌넬레 강은 모든 사람 곁에서 흐를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겨울철 온수와 난방과 기와지붕을 가질 권리가 있다.      

3. 모든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나 이것이 의무는 아니다.     

4. 모든 사람은 실수할 권리를 가진다.      

5. 모든 사람은 유일한 존재가 될 권리를 가진다.      

6. 모든 사람은 사랑할 권리를 가진다.      

7. 모든 사람은 사랑받지 않을 권리를 가지나 이것이 필수는 아니다.      

8. 모든 사람은 인기가 없어도 되고 다른 사람이 몰라도 되는 권리를 가진다.      

9. 모든 사람은 게으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가진다.      

10. 모든 사람은 고양이를 사랑하고 돌볼 권리를 가진다.      

11. 모든 사람은 개가 죽을 때까지 돌볼 권리를 가진다.      

12. 개는 개로서 존재할 권리를 가진다.      

13. 고양이는 자기 주인을 절대적으로 사랑할 의무는 없지만, 주인이 어려운 순간에는 꼭 도와주어야 한다.   

14. 모든 사람은 가끔 자신의 의무에 대해 알지 못해도 되는 권리를 가진다.      

15. 모든 사람은 의심할 권리가 있으나 이것이 의무는 아니다.      

16.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를 가진다.      

17. 모든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18. 모든 사람은 조용히 있어도 될 권리를 가진다.      

19. 모든 사람은 믿음의 자유를 가진다.      

20. 모든 사람은 강제적으로 명령할 권리가 없다.      

21. 모든 사람은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위대함을 깨달을 권리를 가진다.      

22. 아무도 영원히 살 것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23. 모든 사람은 이해할 권리를 가진다.      

24. 모든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도 될 권리를 가진다.      

25. 모든 사람은 다양한 국적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      

26.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축하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27.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 한다.      

28.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나눌 수 있다.      

29.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30. 모든 사람은 형제·자매 및 부모를 가질 권리를 가진다.      

31. 모든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      

32.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진다.      

33. 모든 사람은 울 권리를 가진다.      

34. 모든 사람은 이해받지 못할 권리를 가진다.      

35.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할 권리가 없다.

36. 모든 사람은 사생활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      

37. 모든 사람은 어떠한 권리도 가지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38. 모든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39. 이기려고 하지 마라.      

40. 자신을 방어하지 마라.      

41. 포기하지 마라!      

우주피스 공화국의 헌법이 걸린 골목
소소한 아트샵들이 계속 말을 건넨다.
크래프트 공방 간판

우주피스의 건물들은 올드타운 건물들의 연장선인 것 같지만 더 낡고 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몇 백 년 전 쓰러져 가는 건물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생기를 불어넣어 살고 있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공간들을 만들고 있다.

얼마 전 동료가

“선생님, 이 나라 사람들 철학적인 거 같아요,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철학적인 질문들을 훅훅 던져요. 학생들도 그렇고….

날씨 탓인가? 여기 매일 날씨가 우울하니까 사람들이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는데 이들의 삶의 태도엔 근원적으로 인간 존엄과 예술적 가치의 중요함에 대한 정신이 받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존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많은 시련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아름다움을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  리투아니아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건널목에 사람이 서 있으면 차는 무조건 멈춘다는 거였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을, 먼저 지나가라는 눈인사가 색목인인 나에겐 한없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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