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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May 01. 2024

그리운 한라산,

한라산, 제주, 쉼

한라산이 곧 제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이런 말이 나왔을까 가만이 생각해 봅니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하여 한라산이 선명하게 잘 보인다면 운이 좋은 것이라 하네요.

한라산의 정상이 보일 만큼 맑은 날이 많지 않아서일까요.

제주의 어디를 가도 한라산은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자태만 달리할 뿐 늘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제주도민들은 한라산에서 한해의 무사안녕을 바랐다고 합니다.


한라산은 그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제주에 도착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먼저 보게 되는 곳, 먼저 눈길이 가는 곳, 한라산입니다.

겨울의 한라산은 우리 가족에겐 잊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남편은 겨울등산에 꽂혔던 적이 있습니다.

마치 겨울 동안 전국의 겨울산을 다 다닐 듯한 기세였다고나 할까요.

넘치는 열정에 아이젠과 겨울등산 물품들을 구입하고는 남쪽에서는 그래도 최고인 한라산을 먼저 가기로 계획했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겨울산행이 마냥 신이 났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함께 신고 오른다는 것이 신기하였던지 다들 환호하였고요.

아이들이 어리니 보온장비며, 행여 안전사고가 우려되니 비상약, 이 모든 걱정거리와 준비물등은 엄마의 몫이지요.

10시간 정도 산행이 예상되었기에 새벽부터 기대하며 한라산으로 향했습니다.


우리가 정했던 코스는 성판악코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제주에 많은 눈이 내렸답니다.

눈이 내리니 겨울등산 체험 제대로네, 의지를 다졌지만

눈길을 헤치고 입구에 도착하니 떡하니 '입산금지' 팻말이 붙어있었습니다.


30대의 기세 넘쳤던 남편은 관리자에게 저희 멀리서 왔다며 입구에서 발자국사진만 찍고 오겠다고 부탁드렸네요.

그렇게 아이들과 한 발자국만 찍겠다고 한 것이,

한걸음 한걸음 그러다가 열 걸음,

그리고 등선을 넘게 되고,

새 아이젠을 신고,

새하얀 눈꽃을 보고,

눈바람을 맞았고, 병풍처럼 웅장한 바위들를 보며 그렇게 겨울 왕국을 헤매었습니다.


의기충천한 엄마, 아빠에게 이끌려 위험천만한 겨울산행을 하였네요.

모르면 무식하다고, 더 이상의 눈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인데 왠지 한라산의 기운에 정신을 빼앗겨 그렇게 제주의 하얀 품에 그대로 안겨버린 하루였습니다.

한라산 정상 백록담까진 못 갔지만,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가서 우린 새하얀 설국의 한라산과 만났습니다.


시야가 가 닿는 곳마다 한 폭의 수묵화처럼,

흰색과 하늘색뿐인데 거기서 본 세상은 왜 그렇게 아름다웠을까요.

꼭 먹어야 한다는 대피소의 컵라면은 먹지 못했지만 아이들은 멀리서만 보았던 한라산의 위엄을 제대로 느꼈답니다.

그 후로 얼마간은 등산 가자는 얘기 쑥 들어갔고요.

남편도 마음 한편에 겨울 등산의 로망을 고이 접었다지요.


한라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남편과 아들은 앞서가고, 

딸아이와 둘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눈을 밟고 걸으며 재미있어하던 시간도 잠시뿐이고, 다 와 가니 슬슬 힘들어졌는지 예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했습니다.

저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는데 무슨 힘이었는지, 딸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엄마가 업어줄까?'


'엄마도 힘들잖아, 엉엉.. 그런데 업혀도 돼? 힝..'


'그럼, 업어줄게.'


'그럼, 아빠랑 오빠한테는 비밀로 해줄 거지?'


아 진짜, 이 여우 같은 녀석, 누굴 닮은 게야.


'그럼, 그럼 비밀이지. 우리 딸은 혼자 씩씩하게 내려온 거야.'


그렇게 한라산을 다 내려올 때쯤 우리의 비밀 하나를 그 눈 속에 묻어두고 나왔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엄마 등이 찼을 텐데 고개를 딱 파묻고 바로 엎드리던 그 녀석이 벌써 대학생이 되어 천지로 꽃구경을 다닙니다.


주차장까지 내려오니 망연자실한 남편이 보였습니다.


'자기야, 차 바퀴가 눈에 파묻혀서 운전해 갈 수가 없어..'


그렇게 우리 차는 견인을 하고 힘든 하루를 마무리했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한라산은 제각각의 의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이끌고 겨울등산을 마무리했다는 뿌듯함,


제각각의 인생길을 헤쳐가듯, 그렇게 산을 오르는 가족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며 느낀 작은 행복감,


엄마와의 작은 비밀이 있는 하지만 만만치 않았던 첫 고난의 길, 한라산.


하산길에, 눈 내린 길에서 만난 노루이야기로 종일 신났던 아들까지.

우리 가족에게 한라산은 사랑입니다.


서귀포 가는 길, 날씨가 모처럼 맑아 한라산의 정상이 저만치 보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올랐던 삼십 대의 나에게 한라산은 그렇게 젊었는데,

이제 먼발치서 보니 한라산 꼭대기에 녹지 못한 눈발이 정수리에 난 흰머리 같아 보입니다.


눈 내리는 겨울 말고, 초여름에 녹음이 우거질 때 조용히 한번 한라산에 가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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