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바라보며

by 심가연

미아사거리역과 미아역을 가로 지르는 8차선 대로의 신호등을 아이와 함께 건너려고 할 때였다. 신호등 건너편의 꽈배기 가게에서 단팥빵을 주문할 생각에 초록불이 깜박거리고 있는데도 황급히 아홉 살 평화와 여섯 살 영화의 손을 잡고 뛸 참이었다.


“안 돼! 무리해서 건너면 위험해!”

검은 비닐봉지를 든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영화가 귀여운지 한참 바라보며 아이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뛰려던 우리는 손을 풀고 금새 빨간 신호등으로 바뀐 차도를 보며 기다리기로 했다. 옆에서 같이 다음 신호를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얼마 전 동네에서 있었던 교통사고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던 한 사람이 신호가 바뀌자 서두르다가 일을 치렀다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햇빛이 강렬한 여름날인데도 갑자기 마음이 서늘해지고, 노란 햇빛 아래 그늘의 검은 자욱들이 스산하게 느껴졌다.

무의식 중에 아이의 손을 꽉 잡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마음 속으로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동네에 아는 지인 분에게 이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가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어버렸다.


검은 파도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얼마나 자주 잊었었는지. 내가 매일 걷고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던 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 그 일 이후에도 또 사람들은 그곳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그 아무렇지 않음이 당연하면서도 괜시리 서글퍼진다.

이 싱그러운 나무들이 찬란한 여름, 오히려 죽음에 대해, 짙은 어둠 속으로 뛰어 들어가게되는 여름밤이 늘어난다. 혼자 시름에 젖어 잠든 아이들을 볼 때면 언젠가는 나도. 내 아이들도 사라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이내 머리를 털어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입을 벌리고 옅게 쉬는 아이의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이 소중한 것을 온 힘을 다해 지켜내고 싶을뿐이다.


마당에서 노란 달을 보고, 동네 오패산에서 넘어온 풀냄새를 맡고 한숨을 털어냈다. 그렇게 한 차례의 죽음을 접하고 난 후 마음의 무게를 점점 잊으려고 훌훌 털어버리려고 애썼다. 한층 더 화사한 꽃들과 눈을 맞추며 지금의 생생함을 느껴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이 여름날은 어떤 죽음의 시험대인 것일까. 또 한 다리 건너 아는 지인의 어머니가 사는 지방의 한 아파트에서 어떤 남성이 뛰어 내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1층에서 베란다 텃밭에 각종 파와 고추, 상추를 키웠는데, 새벽잠이 없어 일어나 집안에서 일을 하던 중 땅이 울리는 쿵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깨워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는 뛰어나가 상황을 보고 119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경비 아저씨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그를 살리기 위해 CPR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일을 겪은 어머니는 집안의 창문은 열지도 않고, 최대한 집에 머물지 않고 일하는 가게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옆동에 살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남성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대학생 때 도봉 정신건강센터에서 문학치료와 관련된 봉사활동을 수업으로 이수한 적이 있다. 옛 고전 이야기를 함께 듣고, 그 다음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지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무협을 좋아하는 분들은 꼭 이야기하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고 문이 열렸다. 그 분이 바람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자주 웃었다. 그분의 클리셰가 재미 있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상담가는 참여자들의 이야기를 녹음하며 주의 깊게 경청했고 그 이야기에 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한 남성분이 옛이야기 중 형제간에 싸우는 이야기를 그만 가져오라면서 갑자기 화를 냈다. 나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선생님은 그 분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바로 사과를 하고 진정시켰다. 이제는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그 분이 그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마음이 아프셨는지 종종 아직까지도 궁금해진다.


추측해보자면 어떤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발견하는 이야기들은 결국은 자신이 경험했던 상처인지로 모르겠다. 그 형제간의 불화가 나오는 이야기를 싫어했던 분처럼.

이십대 초반 여대생에게는 중년 남성들과 이야기를 지어내는 시간이 낯설기도 했지만, 이분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끝까지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병력이라거나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분들은 대부분 평범하고 멀쩡해 보였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나는 이십대 후반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으면서 나 역시 정확한 진단을 받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문제를 겪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그러면서 세상에서 어른의 역할을 해내면서도 상처 받은, 혹은 지친 자신을 스스로 잘 돌보지 않는다면 그런 마음의 문제들은 언제든지 블랙홀처럼 나 스스로를 빨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을 하게 된 것 같다.

스물 여덟살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높은 이상과 별볼일 없는 현실 사이에서 그 중간점을 찾지 못하고 좌절했던 시기였다. 안간힘을 쓰며 여러 회사를 옮겨보고, 창업지원금을 받아서 창업도 해보고 외주 프리랜서 일까지하면서 자리를 잡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눈에는 일반 직장인들처럼 안정적인 직장과 꾸준한 벌이가 없으니 늘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괴로워서, 결혼을 통해 가족들 벗어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나니, 나는 남편에게 지나치게 심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의지했다. 그가 건강하고 젊을 때까지는, 우리가 두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모든 상황들이 괜찮았다. 그러나 문제들은, 그리고 내가 일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위축된 마음과 가족 사이에서 인정 받지 못하면서 생긴 상처들이 두 아이를 키우면서 더 문제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가족관계에 있어서 아이를 키우는데 가족들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결국은 육아 당사자인 엄마가 돈을 벌면서 관계를 잘 쌓아왔을 때야 가능하다. 당연하게도 부모님도 먹고 사셔야하고 모두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혼자서 아이를 키웠다. 남편은 광고쪽에서 일하면서 뻑하면 주말에도 야근을 했고, 피티 날짜가 잡히는 날은 기약 없이 그를 기다리는 날들이 많았다.

그 사람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가 오면 아이를 맡기고 그제야 밖으로 나가 한 시간쯤 걸어서 장을 보고, 문구를 구경하며 하나 집어오는 것이 어떻게 보면 그 시절의 유일한 산책이나 낙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의 문제는 내가 나를 소중하게 돌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들이 나를 대해준 것처럼 내 스스로도 나를 대했다. 내가 아이를 낳았고 제대로 쉬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지 못해서 화가 나고 슬프고 우울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는 잘 몰랐다. 내 아이는 너무 어렸고 약하고 소중했기에 아이가 울면 언제든지 엄마가 버튼처럼 일어나 아이의 말에 응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삶의 리듬이. 내 삶 자체가 통제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두 아이를 낳으면서 처참하게 나온 뱃살과, 20킬로까지 치솟은 체중,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내 스스로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내가 싫어진 것이다.

이 때의 감정은 지금도 남아있어서 내가 거울 속의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지금도 종종 바라본다. 거울 속의 내 얼굴과 표정이 괜찮은지. 내가 나를 잘 사랑해주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첫째가 2015년, 둘째가 2018년,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점점 다시 내가 하려던 일을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시도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독서교실 강사로 일을 시작했고, 작가 교육원에 가서 드라마를 습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만나면서 점점 다시 외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안경을 벗고 라식수술을 했다. 생전 처음으로 눈썹 문신을 하기도 했다. 다시 달라지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나아가자는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하지 않았던 라식과 눈썹문신 같은 시술까지도 해보면서, 거울 속의 나를 다시 바라보고 사랑해보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이제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웃어준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제 때 잠을 자고 쉴 수 있게 해준다. 깔끔한 옷을 입혀주고, 가끔씩은 고급 외투를 사서 멋을 부리고 가는 자리에 기죽지 않게 해준다. 거울 속의 나는 그렇게 챙겨주는 내게 이제는 온전히 스스로를 이해하고 다룰 줄 알게 되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나 스스로를 위해 지금도 완전히 자연스럽고 정말 기쁜 듯이 웃고 싶다.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내 그림자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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