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드와 하늘

인스타소설

by 은상

1


“갖다 버려라, 인마.”


터덜터덜 걸으면서 쌩쥐가 소리친다. 입이 뾰족해서 쥐새끼, 생쥐, 쥐며느리(사실 이건 곤충이지만)라고 불리다가 쌩쥐로 별명이 정착된 녀석이다.


“그래 갖다 버려, 새끼야.”


이번에는 곰보가 소리친다. 진짜 곰보는 아니고 어렸을 때 여드름을 심하게 앓았는지, 얼굴이 거칠다. 성질이 더러워서 본인 앞에서는 아무도 곰보라고 부르지 않지만, 어쨌든 곰보다. 예전에 권투를 했다는 곰보는 곰보라 부르는 사람을 박살 낸 적도 있다고 스스로 말하고 다녔다.


이 둘은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 나름 이 동네에서 잘 사는 곳이라 들었는데 집에 돈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65인치짜리 텔레비전이 마음에 들었지만, 벽에 딱 붙어 있어서 뜯어낼 수 없었다. 뜯어내 봤자 들고 다닐 수도 없고, 팔 데도 없었을 것이다. 요즘은 전당포에서도 아무 물건이나 받아주지 않아서, 웬만한 물건을 들고 나와도 소용이 없다. 금이나 현금이 최고인데, 집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씨씨티비는 있었냐?”


곰보가 물었다.


“아니, 없었던 것 같아.”


쌩쥐가 그나마 들고 나온 도자기 하나를 유심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별로 부자도 아닌가 보네. 돈 나가는 것도 하나도 없고, 씨씨티비도 없고.” 곰보는 울화통이 터지는지 갑자기 쌩쥐에게 소리쳤다. “그것도 갖다 버려, 새끼야! 딱 봐도 몰라? 그냥 꽃병이잖아. 누가 진짜 청자를 장식장도 아니고 부엌 선반에다 올려놓냐?”


“혹시 모르잖아.” 쌩쥐는 도자기를 소매로 훔치며 말했다.


“밑을 봐.”


이불로 둘둘 만 뭔가를 아기처럼 안고 있던 고릴라가 말했다. 보통 고릴라라는 별명을 듣는다면 얼굴이 원숭이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남자의 얼굴은 오히려 앳되 보였고, 선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어깨부터 팔 그리고 손까지 이어지는 상체가 유난히 발달해서 고릴라라는 별명이 딱 어울렸다. 특히 그 큰 손이 눈에 띄었다.


“밑?”


쌩쥐는 고릴라의 말을 듣고 휴대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도자기 아래쪽을 유심히 보던 쌩쥐가 말했다.


“강화자기라고 쓰여 있는데? 와, 씨바 이거 진짜인가 봐. 고려 때, 일본에서 쳐들어와서 강화도로 왕이 도망 갔다며? 와, 나 진짜 똑똑한가 봐. 중학교 역사 시간에 배운 게 막 생각나네?”


쌩쥐가 들떠서 말했다.


“일본이 아니라 몽고였어. 그리고 강화자기라고 한글로 쓰여 있지?”


고릴라가 물었다.


“그럼 우리나라 자기인데 영어로 쓰여 있겠냐?” 쌩쥐가 잘난 척 하며 대답했다.


“버려, 이 무식한 새끼야!”


곰보의 외침이 새벽 주택가 뒷골목에 울려퍼졌다.


곰보는 곧 이어 고릴라에게도 외쳤다.


“너도 버려 이 새끼야. 고시원 사는 놈이 무슨 개를 키워? 그거 눈에 띄면 우리 다 걸려 들어간다고!”


고릴라는 그 말을 못 들었는지, 강아지를 안고 도시의 골목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2


강 부자의 집은 빌라, 고시원, 원룸만 가득한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문 단독주택이었다. 그 집 땅 정도면 빌라 두 채는 지을 수 있을 만큼 넓었고, 강 부자가 지방에 커다란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집을 타깃으로 삼은 건 곰보였다. 곰보가 일하는 목욕탕의 여직원이 말해줬다는 것이다. 1박 2일 일정으로 가까운 온천이나 다녀오려 한다고 목욕탕에서 그 집 사모가 수다를 떨었다는 것이다. 굳이 대중탕에 와서 고급 온천에 간다고 자랑을 하는 심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곰보에게는 좋은 정보였다. 마침 돈도 떨어져 가던 참이었다. 이전에는 손님들 지갑에 슬쩍 손을 대기도 했다. 이 손님 저 손님 지갑에서 만 원 정도씩만 빼 가면 그냥 넘어가는 수가 많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딱히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의실에 씨씨티브이를 설치하면서부터 그 짓도 이제 못하게 됐다. 여자 탈의실 쪽은 설치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쪽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게 한 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날, 강 부자의 집에서 들고 나온 것은 싸구려 도자기 한 개, 그리고 입이 툭 튀어나온 못생긴 강아지 한 마리뿐이었다. 그 강아지가 처음 달려왔을 때는 깜짝 놀랐지만 짖지도 않고 사람을 반겼다. 특히 고릴라에게 관심이 있는지 집을 뒤지는 내내 쫓아다녔다. 고릴라는 결국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그 못생긴 강아지 한 마리만 데리고 나왔다. 빈 집에 개만 한 마리 있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개의 행동을 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3


고릴라는 고이 품에 안고 온 강아지를 혼자 눕기에도 비좁은 침대에 올려 놨다. 솔직히 걱정은 됐다. 강 부자가 찾을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니라 시끄럽게 짖기라도 하면 고시원에서 쫓겨날까 봐 걱정이었다. 하지만 강아지는 한두 번 ‘낑’하는 소리를 냈으나, 침대가 자기 집인 듯 편안하게 누웠다.


얼굴은 뾰족하고, 강아지답지 않게 다리도 길었다. 하는 짓과 생긴 게 강아지 같기는 했지만 몸도 꽤 컸다. 고릴라는 큰 손으로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름이 뭐냐?”


고릴라가 물었지만 강아지가 대답을 할 리 없었다. 고릴라는 책상에 올려 둔 연습장과 연필을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인력 시장에 나가는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자주 나갈 수 있다면 생활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고릴라는 누가 봐도 힘을 잘 쓰게 생겼기 때문에 건설 현장에서 자주 픽(pick)을 했다. 하지만 요즘 근처에 건설 현장이 많이 줄어서 일이 별로 없다.


고릴라는 연필을 들고 강아지를 연습장에 옮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배운 적도 없지만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강아지는 마치 자기가 모델이라도 되는 양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러더니 쓱 눈을 감고 잠이 들어버렸다.


이미 시간은 새벽 세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고릴라는 연필을 놓았다.


“일이 없더라도 나가 봐야지. 안 나가면 우리 다 굶어 죽어.”


고릴라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을 했다. 고릴라는 침대를 강아지에게 내주고 그 옆 공간에 모로 누워 잠을 청했다. 한 시간 후면 눈을 떠야 한다.




4


주택가 한쪽에 자리 잡은 작은 공원은 이들의 아지트다. 공원이라고 해봐야 벤치 두 개와 새벽에 노인들이 와서 가끔 사용하는 이상한 모양의 운동 기구가 전부다. 그나마 공원 주변을 큰 나무들이 감싸고 있어서 동네를 푸르게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오히려 밤이 되면 그 나무가 시야를 가려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기 꺼리게 만든다.


쌩쥐가 식은 탕수육과 이과두주 한 병, 소주 한 병을 들고 왔다. 쌩쥐는 외삼촌이 사장으로 있는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이들 중에서 가장 사정이 낫다.


곰보가 종이 컵에 따른 소주를 들이키고 나서 소스 없는 탕수육을 하나 입에 물고 말했다.


“이 탕수육 네가 튀긴 거냐? 더럽게 맛없네.”


“그냥 남은 거 들고 온 거야. 보통 아침에 한 번 튀겨 놨다가 주문 들어오면 그거 한 번 더 튀겨서 나가거든. 지금은 한 번 더 안 튀기고 가지고 온 것이라서 그래. 그런데 주방장 없을 때는 나도 주방에 들어가서 탕수육도 튀기고, 짜장면도 만들어. 그날 손님은 재수 없는 거지. 흐흐흐.”


쌩쥐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곰보는 다시는 저 중국집에서 뭔가 시켜 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곰보는 다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그만 하고 이리 와! 술이나 한 잔 먹자.”


고릴라가 이상하게 생긴 강아지를 데리고 공원을 달리고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 목줄도 하나 채웠다. 고릴라는 달리려고 하는데 강아지는 전혀 달리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냥 고릴라 혼자 즐거워하는 듯했다.


고릴라가 얼굴에 웃음을 잔뜩 띤 채로 강아지와 함께 걸어왔다.


“야, 그거 갖다 버리라니까. 개도 특이하게 생겨서 들키면 우리 다 같이 감방 간다.” 쌩쥐가 퉁을 줬다.


“야, 이 개가 뭔지 알아? 그것보다 이 개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아?” 고릴라는 자랑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오늘 일 나갔다가 허탕 치고 돌아오는데, 이 개가 걱정되었거든. 낑낑거리거나 짖어대면 분명 신고가 들어왔을 것 같아서, 서둘러 들어오다가 옆집에 살고 있는 백수를 복도에서 만났어. 내가 혹시 어디서 개 짖는 소리 안 나냐고 넌지시 넘겨 짚어 봤지. 그런데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거야. 혹시 도망간 것 아닌가 걱정하며 방문을 열었는데 이 녀석이 아침에 내가 나갈 때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들어갔더니 씩 웃더라고.”


“헛소리 하지 마. 개가 어떻게 웃냐?”


쌩쥐가 식어버린 탕수육 하나를 개 앞에 던져 주면서 말했다. 개는 냄새만 두어 번 맡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곰보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낄낄 웃었다.


고릴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아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이 강아지가 워낙 똑똑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어. 무슨 종인지, 무엇을 잘 먹는지, 성격은 어떤지. 글쎄 이 개가 말이야, 무려 그레이하운드더라고.” 고릴라는 쌩쥐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너 그레이하운드 알아? 모르지? 알 리가 없지.”


“이 자식이 사람 무시하나.”


쌩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고릴라가 정색을 하자 자리에 다시 앉았다. 쌩쥐는 고릴라와 직접 맞부딪친 적은 없지만, 그 힘은 잘 알고 있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어떤 회사원 무리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고릴라는 말리는 입장이었지만 상대방 회사원이 사색이 되며 급하게 사과하는 모습을 쌩쥐는 목격했다. 고릴라가 조용히 회사원의 멱살을 잡고 ‘싸우지 말라’며 들어서 구석으로 옮겨버렸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자신의 머리 크기만 한 손에 멱살을 잡혀, 진짜로 ‘들려서’ 이동당한 회사원은 깐죽대던 쌩쥐가 아니라 고릴라에게 사과하더니 물러났다. 그 큰 손과 거기서 나오는 힘을 느끼면 누구라도 겁에 질릴 것이다. 쌩쥐도 마찬가지였다.


고릴라는 표정을 풀고 말을 이었다.


“그레이하운드는 말이야 삼천 년 전 이집트 벽화에서도 발견되는 개야. 주인을 잘 따르는데, 사냥개 출신이래. 시속 7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어서 치타 다음으로 빠른 동물이래.”


고릴라를 얼굴 전체에 미소를 띠고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그건 다 어떻게 알았냐?” 쌩쥐가 물었다.


“인터넷.” 고릴라가 큰 손으로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


“야, 너 전화기 버튼은 누를 수 있냐?” 곰보가 고릴라의 큰 손을 놀리며 말했다.


“뭐, 대충.” 고릴라는 얼버무렸다. 사실 문자를 보낼 때 옆의 버튼을 자꾸 건드려서 오타가 자주 나기는 한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개가 뭐 저 모양이냐?”


곰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랬다. 개는 전혀 달리려는 의지가 없는 듯했다. 틈만 있으면 그냥 가만히 엎드려서 사람만 쳐다보고 있다. 조금 전 달리기를 시키려 할 때도 재촉하는 건 고릴라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다시 한 탕하자.” 곰보가 말했다.


“무슨……?”


“내가 여탕 직원에게 들었는데, 그 강 부자 말이야. 돈은 모조리 은행에 저금하고, 집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대.”


“왜, 그걸 지금에야 말한대?” 쌩쥐가 불만인 투로 말했다.


“지금에야 알았다잖아. 어쨌든 그래도 항상 지갑에 현금이 들어 있고, 차에는 사고 났을 때 합의금 주려고 백만 원을 넣고 다닌대.” 곰보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데도 주위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아항.” 쌩쥐도 따라서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그러면 차를 훔치자는 거야?”


곰보는 쌩쥐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소리는 상당히 컸다. ‘탁’ 하는 소리가 나자 강아지가 벌떡 일어섰다. 놀란 모양이다.


“저놈 겁은 엄청나게 많네.” 곰보는 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쌩쥐에게 말했다. “내가 ‘한 탕’이라고 했잖아. 한탕은 백만 원 정도가 아니라고. 그리고 너 차는 훔칠 수 있어? 그것도 기술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면?” 고릴라가 놀란 강아지를 쓰다듬어주며 물었다.


“여탕 직원의 말이 강 부자 부부가 아직도 사이가 그렇게 좋다는 거야. 부인 말이라면 껌벅 죽는대.”


“여탕 직원은 뭘 그렇게 많이 알고 있어?” 고릴라가 물었다.


“여탕이 이 동네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이야. 목욕탕 휴게실에 빨가벗고 앉아 있는 아줌마들이 이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야기하지. 앞집 슈퍼마켓 아저씨 속옷이 몇 장인지까지 알 수 있어.”


“그래서 몇 장인데?” 쌩쥐가 말했다.


“그게 중요해?” 여지 없이 곰보의 손바닥이 쌩쥐의 머리로 향했다. 곰보는 손을 거둬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주차장 문이 열리고 차가 들어올 때 재빨리 쫓아 들어가서 부인만 붙잡으면 강 부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내놓을 거란 말이야. 그냥 붙잡고 겁만 주면 돼. 강 부자한테 현금카드 받아서 한 명이 돈만 빼오면 끝이야. 아무도 안 다칠 거고, 아무도 안 잡힐 거야. 다시 돌아오겠다고 협박하면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을 거야.”


“오케이, 나는 뭘 하면 되지?” 쌩쥐가 동의했다.


사실 쌩쥐는 계획이 아무리 허술하든, 무엇을 해야 하든, 얼마가 남든 동의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배달일에서 벗어나 폼 나게 살 수 있을까만 생각했으니까.


“난 싫은데.” 고릴라가 말했다. “난 사람 다치게 하는 거 싫어. 협박하는 것도 싫고.”


“웃기지마.” 곰보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 있었다. “솔직히, 도둑질이나 강도나 뭐가 다르냐? 넌 이미 도둑놈이야. 그리고 너 돈 있어? 오늘도 공쳤다며?” 곰보는 강아지를 가리켰다. “저 그레이하운드인지 뭔지 하는 개의 사료나 살 수 있어?”


고릴라는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니 자신의 커다란 손만 보였다. 고릴라는 손만 만지작거렸다.


곰보는 말을 이었다.


“넌 그 주먹으로 뭐할래? 넌 딱 봐도 사람 패라고 태어난 놈이야. 재능을 써야지, 인마.”


고릴라는 강아지의 목줄을 잡았다.


“가자.”


강아지는 별로 걷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고릴라는 강아지를 안아 들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뒤에서는 곰보의 목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야, 생각해보라고. 재능을 살려야지!”





5


고릴라는 참치캔을 하나 따서 강아지에게 줬다. 강아지는 입에 기름을 묻혀가며 잘 먹었다.


작은 물통도 하나 사고 다음날은 사료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은 2만원이 전부. 고릴라는 작은 침대 하나와 침대에 걸터 앉아야 쓸 수 있는 책상 하나가 전부인 방을 둘러보았다.


‘좁다.’


그동안 지친 삶을 사느라 좁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오늘 따라 유난히 방이 작아 보인다.


여전히 침대는 강아지에게 내주고 자신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스마트폰을 꺼냈다. 검색 창에 그레이하운드라고 쳤다.


‘그레이하운드는 활동적인 견종이라 하루 40분은 마음껏 달리게 해줘야 한다.’


고릴라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이 현실감이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더니 딱 그 모양이었다.


마음껏 달리게 한다고? 여기서?


다행히 강아지는 달릴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냥 편안하게 침대에 배를 대고 엎드려 있다.


고릴라는 비어 버린 참치캔을 치우면서 말했다.


“야, 넌 어떻게 그레이하운드라는 놈이 그렇게 게으르냐? 달리는 게 싫어? 그러면 나야 좋지만, 그레이하운드답지 않은 거 아냐?”


옆의 벽이 쿵쿵 울린다. 강아지가 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더니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살폈다.


옆방 남자인데 자신이 고시생이라 예민하다며 조금만 소리가 나면 저 야단을 떤다. 고릴라는 강아지를 끌어안아주며, 혹시 옆집 남자가 이쪽 벽에 항상 귀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본다.


‘내가 누구를 걱정하냐? 빨리 돈 벌어서 이 닭장을 빠져나가야지.’


스마트폰이 울렸다. 곰보다.


- 빨리 결정해라. 내일 모레 저녁 여덟 시부터 강부자 집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너 안 하면 다른 놈 하나 데리고 온다.


고릴라는 답을 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쥐었다.




6


어둠이 내린 마을 공원은 을씨년스럽다.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노인 한 명만 자전거 비슷한 기계를 돌리고 있다.


곰보는 노인이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담배를 하나 입고 물고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곰보가 가는 곳에는 항상 쌩쥐가 있다. 역시 담배를 하나 물고 공원 바닥에 침을 뱉고 있다.


“여어, 오는구나. 그럼 그렇지.”


곰보가 손을 들고 과장되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고릴라가 강아지를 안고 오는 것을 본 것이다.


고릴라도 어색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쌩쥐도 과장되게 피식 하고 웃었다. 쌩쥐는 혼자 잘난 척하는 고릴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구는 좋은 일이라서 이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나? 먹고살려고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쌩쥐는 다시 침을 뱉었다.


고릴라는 강아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선언하듯 말했다.


“난 망만 볼 거야. 사람 붙잡고 때리고 그런 건 안 해. 내 몫이 조금 적어도 어쩔 수 없어.”


쌩쥐는 다시 픽 하는 소리가 나도록 웃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야.


“겁쟁이 새끼. 그래 넌 망만 봐라. 똑같이 겁쟁이인 저 개새끼처럼.”


쌩쥐는 놀리듯이 말하더니, 강아지를 때릴 듯이 발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강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작은 이빨을 내밀어 으르렁거렸다.


“어쭈? 이 새끼가 정말.”


쌩쥐는 진짜 화가 난 듯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강아지는 언제 이빨을 드러냈느냐 싶게, 재빨리 도망갔다. 그레이하운드가 정말 빠른 개라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야, 저 새끼 도망가는 것 봐라. 정말 빠르…….”


쌩쥐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고릴라가 쌩쥐의 멱살을 잡았다.


“야, 장난이야, 장난.”


쌩쥐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고릴라의 손을 풀려고 했다. 쌩쥐의 주먹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고릴라의 주먹은 꼼짝하지 않았다.


“자 그만하고.” 곰보가 와서 말렸다. “내일 저녁에 한 탕 잘하고 이 바닥 떠나자. 나도 더 이상 못해먹겠다. 지네들은 때 벗겨서 기분 좋겠지만, 난 그 때를 청소해야 해.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지친다.”


강아지는 어느새 고릴라 옆으로 다가와서 숨을 작게 내쉬고 있었다. 고릴라는 강아지를 보더니 손을 풀었다.


“내일 보자.”


고릴라는 다시 강아지를 안고 돌아갔다.


쌩쥐는 멀어지는 고릴라를 보며 말했다.


“저 새끼, 저거 데리고 갈 거야? 골치 아파지는 데.”


“그래도, 저 새끼 힘 좋잖아. 지도 급해지면 힘을 쓰겠지.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겠어?”


곰보는 씩 웃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운동을 하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7


쌩쥐는 손을 비볐다. 늦은 가을에 접어들고 있어서인지 저녁이 되니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덟 시부터 기다렸지만 아직 강 부자의 집에는 불도 켜지지 않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며 다가오던 곰보는 쌩쥐의 어깨를 툭 치더니 말했다.


“야, 여기 저기 좀 돌아다녀. 한곳에서 서서 저 집만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의심하겠다.”


쌩쥐는 씩 웃더니 골목 끝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고릴라가 서 있었다.


“개는 어디다 두고 왔냐?” 쌩쥐가 물었다.


“고시원.”


“그 좁은 데서 잘 지내?”


“뭐, 나름. 사료도 주고 물도 주고 왔어. 소리만 내지 않으면 쫓겨나지는 않겠지.”


고릴라가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 개는 좀……” 쌩쥐는 고릴라의 눈치를 봤다. “이상한 것 같아. 움직이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더라?”


“개마다 다르겠지. 그레이하운드라고 다 뛰는 걸 좋아하겠어? 독특한 놈들도 하나씩은 있겠지.” 고릴라는 말하다 멈추고 몸을 피했다. “저 차 아니야?”


열 시가 가까워 오는 순간, 차 한 대가 골목 쪽으로 접어들려고 깜박이를 켰다.


“돈이 많더더니 순 노랭이네.” 골목 옆으로 같이 몸을 숨긴 쌩쥐가 말했다. “벤츠라도 타고 다닐 줄 알았는데, 겨우 국산차야?”


쌩쥐는 평소 차에 관심이 많았다. 배달용 스쿠터도 매일 자기가 손을 볼 정도였다. 그 바람에 스쿠터는 밤만 되면 LED 조명을 정신 없이 반짝거리는 불의 전차가 된다.


곰보가 손짓하는 게 보였다. 그 차가 맞나 보다. 쌩쥐가 재빨리 달려갔다. 고릴라는 밖에서 망을 보기로 했기 때문에 그리 급하게 달려가지는 않았다.


골목 끝에 있는 집의 차고가 열리는 게 보였다. 언뜻 봐도 그 안에 차를 세 대는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보인다. 고릴라는 이전에 집 안까지 들어가 봤지만 차고가 그렇게 넓은 줄은 몰랐다.


고릴라는 저 차고의 반의 반만 한 방 하나만 있어도 이 짓을 하지 않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쌩쥐와 곰보는 차 뒤에 바짝 붙어서 앉은 걸음으로 쫓아 들어갔다. 강 부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누가 그렇게 쫓아서 들어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고 문이 닫혔다.


고릴라는 차고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 부자의 집은 골목 안쪽에 있어서 조용하기는 하지만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씨씨티브이라도 한 대 있을 듯한데, 어지간히 무던한 사람인 것 같다.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분명이 얼마전에 도둑이 들어서 개도 훔쳐 갔다는 것을 알 텐데 아직 아무 대책도 세워놓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놀라웠다.


곰보의 말에 의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일단 가지고 있는 현금을 빼앗고, 부인을 인질로 잡고, 강 부자와 같이 가서 돈만 뽑아오면 끝이었다. 고릴라는 공연히 발로 땅을 찼다. 지금이라도 도망을 가고 싶었다. 아무리 간단하게 끝난다 하더라도 결국 강도였고, 자신은 강도의 공범일 뿐이다. 망을 봤다고 강도가 강도가 아닌 것이 아니다.


이 커다란 주먹은 결국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태어났다는 증거인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연필을 잡기에도 불편하게 큰 그 손이 원망스러웠다.


“야이, 씨…….”


곰보가 지르는 소리가 차고 문을 넘어서 들려왔다. 그리고 뭔가 와장창 하고 쇳덩이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고릴라는 차고에 귀를 댔다. 한 여성이 흐느끼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분명 사람은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했는데.’


고릴라는 차고 문을 두드렸다. 금속으로 만든 차고 문이 큰 소리로 울렸다.


“무슨 일이야?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며?”


고릴라가 소리쳤다. 고릴라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랬는지 안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소리가 커졌다.


“살려주세요!”


그에 맞춰 쌩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못해? 확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


또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고릴라의 귀에 들려 왔다.


고릴라는 주머니에 넣어둔 스키 모자를 꺼내 썼다. 이것을 쓰며 눈만 뚫려 있어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다고 하며 오늘 곰보가 나눠준 것이다. 이것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문 열어봐. 나도 들어 갈래.” 고릴라는 안에다 대고 소리쳤다.


“넌 밖에 있으라니까, 새끼야!” 쌩쥐의 목소리다.


“문 열라니까!” 고릴라가 소리쳤다.


차고 문이 윙 하는 소리를 내더니 위로 스스륵 올라갔다.




8


중년, 아니 장년의 두 남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자는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남자는 한쪽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 따귀라도 맞은 모양이다. 남자의 머리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보였다. 고릴라는 아버지를 떠올렸지만 그것 때문에 그 남자를 동정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고마워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빨리 집을 탈출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얼굴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쌩쥐의 손에는 아까 보이지 않던 작은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밖에서 들리던 쇳소리는 저것이내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사람은 안 건드린다고 했잖아.” 고릴라가 말했다.


곰보는 모자를 입까지만 걷어 올렸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한번 길게 내뿜더니 곰보가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이제 정말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목소리에 힘이 없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했다.


“씨발, 이 사람들 강 부자가 아니래.” 쌩쥐가 쇠파이프를 붕붕 소리가 나게 휘두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이 집 관리인이래. 강 부자는 지금 거의 아들이랑 미국에서 산대. 한국에 있는 이 집에 사람이 안 살면 집이 망가진다고 해서 이 사람들 고용해서 가끔 살라고 한 거래.”


부부는 쌩쥐의 눈치만 봤다.


이 집에 아무 귀중품이 없는 이유가 이해가 됐다. 그럼 강아지는? 강아지는 뭐였지?


고릴라는 부부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면 그 개는 뭐였어요? 그 그레이하운드 새끼 말이에요.”


부부는 닮는다고 하더니, 두 명 다 눈이 커졌다.


“야! 입 닥쳐.”


곰보가 황급히 소리쳤다. 지금 고릴라는 이전에 이 집에 들어와서 도둑질까지 했다고 다 자백하는 꼴이었다.


서로 눈치를 보더니 아줌마 쪽이 입을 열었다. “그…… ‘스피드’ 말인가요?”


강아지의 이름이 스피드였나 보다. 그러고 보니 고릴라는 강아지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곧 헤어지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스피드는 도련님이……” 아줌마가 말을 이었다. “혈통 좋은 개라며, 미국에 곧 데려가서 경주견으로 만들 것이라고…….”


“안 돼!”


고릴라가 소리쳤다.


“뭐가 안 돼? 이 미친놈아. 그깟 개새끼가 뭐라고!”


곰보가 담배를 던져버리고 다가 오더니 고릴라를 밀쳐버렸다. 더 말하다가는 누군지 금방 들켜버리고 말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들켰나? 어쩌면 이제, 언덕을 넘어버린 것도 같다. 쓰레기를 언덕 너머로 던져 버리면 이쪽은 깨끗하겠지? 역시, 그 여탕 담당 직원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맞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왜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갔지? 곰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릴라는 알고 있었다. 스피드는 미국으로 가면 아마 죽을 것이다.


고릴라는 이제 스피드라고 이름을 알고 있는 강아지가 한국에서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자기는 한국에서 태어난 덕을 본 게 하나도 없는 듯했지만, 스피드에게는 아니었다.


미국에서 경주용 그레이하운드는 그야말로 달리는 기계다. 기계는 성능이 떨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진다. 지금 말하는 버려진다는 단어의 의미는 폐기다. 더 이상 키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기 싫어하는 그레이하운드라면 더더욱 그렇다. 달리기 싫어하는 그레이하운드라면, 확실하다. 죽일 것이고 죽을 것이다.


“고릴라, 저 사람들 묶어라.”


곰보는 가방에서 빨랫줄을 찾아서 던져 주었다. 곰보는 생긴 것답지 않게 준비성은 철저했다. 이제 정체를 거의 들킨 것 같으니, 관리인 부부를 어떻게 ‘처리’해야 했다. 차 드렁크에 싣고 가다가 어딘가에 ‘버리면’ 해결이다.


“싫어.” 고릴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구멍이 뚫린 모자 사이로 곰보의 눈이 움찔하고 움직이는 게 보였다.


순간 고릴라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비틀하면서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둔중하면서도 극심한 통증이 머리로 전달돼 왔다. 머릿속에서 누가 쇠망치를 두드리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그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실재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귀에서 웅웅 울리는 듯한 욕설이 들렸다.


“야이, 새끼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생긴 대로 놀아, 이 새끼야.”


쌩쥐의 목소리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쇠파이프가 보였다.


무릎을 꿇고 있는 고릴라의 옆구리로 쌩쥐의 발이 날아들었다. 고릴라는 날아오는 발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힘차게 밀쳐냈다. 쌩쥐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달려오면서 쇠파이프를 힘차게 휘둘렀다. 고릴라는 몸을 돌려 피하면서 주먹을 힘차게 휘둘렀다. 주먹은 그대로 쌩쥐의 턱에 명중했다. 쌩쥐의 몸이 조금 위로 뜬 것도 같았다. 쌩쥐는 무너져내렸다.


이번에는 곰보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곰보의 주먹은 정확하게 옆구리와 관자놀이를 겨냥했다. 중학교 때 권투를 했었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주먹은 빨랐고 매서웠다. 그리고 쉼이 없었다.


고릴라는 커다란 팔과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손이 큰 덕분에 권투 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방어하는 것처럼 그렇게 웅크리기만 해도 많은 곳을 막을 수 있었다.


곰보는 그 방어 위로도 계속 주먹을 날렸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주먹에 코를 맞아서 코피가 흘렀다. 고릴라는 맞고만 있는데도 숨이 찼다. 그러나 곰보는 더 했다. 중학교 이후부터는 운동을 해본 적도 없고, 술 마시고 담배만 피웠다. 주먹을 내지를 기술은 남아 있는지 몰라도, 유지할 체력이 없었다. 곧 주먹이 느려졌다.


고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느려진 주먹 사이로 팔을 뻗었다. 고릴라도 지쳤지만 주먹이 곰보의 배에 닿았다.


곰보는 교통사고를 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이 막히고, 오전에 먹은 밥까지 다 올라오려 했다. 뒤이어 얼굴 왼쪽으로 주먹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리고 허리를 움직여 상체를 뒤로 빼려 했다. 하지만 배에 받은 충격이 동작을 느리게 했고, 비록 팔로 막았지만 충격이 얼굴로 그대로 전해왔다. 다리가 풀림과 동시에 곰보는 알았다.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말했잖아. 넌 싸움에 재능이 있다고. 졌어, 내가 졌어. 네 마음대로 해라.”


곰보는 누워서 중얼거렸다.


고릴라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너무 놀라 아직도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관리인 부부에게 다가갔다. 고릴라와 눈을 마주친 그들은 흠칫 놀랐다.


그나마 앳되 보이는 얼굴까지 가린 상태이다 보니 고릴라는 정말 고릴라처럼 보였다. 거대한 상체는 더욱 도드라졌고, 이제 주먹에 피까지 묻어 있었다.


먼저 남편 쪽이 엎드려 빌었다.


“제발 살려 주십쇼.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가진 것도 없고요.” 남편은 울먹였다.


옆에 있던 부인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잘못한 것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고릴라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늘 일은 잊어 주세요.” 고릴라는 목이 매였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스피드도요. 스피드는 미국으로 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것이 좋아요.”


관리인 부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이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지금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고릴라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쌩쥐를 둘러멨다. 곰보는 자기 발로 걸어 나왔다.


“야, 저놈 내 자취방까지만 데려다 줘. 그리고 너는 더 이상 이 동네에서 얼굴 보지 말자.” 곰보가 배를 움켜쥐고 말했다.


고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곰보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고릴라가 자신들을 때려 눕히지 않았다면, 그 관리인 부부를 어떻게 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 정도까지 각오가 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쌩쥐는 또 모르지만.




9


“마침, 저기 오네.”


관리인이 말했다. 이번에는 이 고시원의 관리인이다. 관리인이자 운영자, 즉 주인이다. 고릴라는 오늘 두 번째 ‘관리인’을 만나는 셈이다. 집마다 관리인이 있는데 왜 사람은 관리해주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관리인은 옆방에 사는 그 민감한 놈과 함께 있었다.


“자네, 이 방에서 개를 키우나? 시끄럽다고 지금 난리야. 여기는 개는 금지야. 자네가 나가거나, 개를 버리든지 해.”


관리인은 고릴라가 인사도 하기 전에 목소리를 키우며 말을 쏟아냈다. 그 목소리가 커서 그런지, 다른 방의 문도 열렸다. 사람들은 자기들에게도 불똥이 떨어질까 봐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그 와중에도 스피드는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있었다.


고릴라는 말 없이 자기 방의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있던 스피드는 고개만 들고 꼬리를 흔들었다. ‘게으른 녀석.’ 그 모습을 보니 공연히 웃음이 나왔다.


고릴라는 가방을 꾸렸다. 짐이라고 해봤자 커다란 배낭 하나에 모두 들어갈 정도다. 관리인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릴라는 스피드에게 목줄을 해주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관리인에게 말했다.


“지금 방 뺄 게요. 두 달치 선금 낸 것만 제 계좌로 보내 주세요.”


“그, 그래.”


관리인은 고릴라의 담담한 모습에 당황했다. 뭐라고 사정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말을 들으니 오히려 무서웠다. 공연히 개줄을 잡고 있는 커다란 주먹에 자꾸 눈이 갔다. 재빨리 돈을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릴라는 복도를 가로질러 갔다. 빼꼼히 내놓은 사람들의 얼굴은 싸우기 싫어하는 싸움꾼과 뛰기 싫어하는 달리는 개를 ‘환송’해주는 꽃이었다.






10


고릴라는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한참을 걸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금방이라고 했는데, 좌우로 논이 쭉 펼쳐진 길을 계속 걸었지만 아직도 스마트폰 지도에는 1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시가 나왔다.


스피드는 무척 걷기 싫다는 티를 내면서 100미터마다 걸터앉아 쉬었다. 여기까지 데려오려고 마지막 재산을 다 털어서 켄넬(케이지)을 샀다. 거기에 넣지 않으면 버스에 태울 수도 없었다. 다행히 아직 다 크지 않은 강아지라, 그리고 얌전한, 아니 게으른 녀석이라 켄넬에 넣고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고도 그 비싼 켄넬을 버릴 수 없어서 한손에는 녀석의 목줄을 잡고, 한 손에는 켄넬을 들고,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자니 죽을 맛이다. 그렇게 이십 분을 더 걷고 나서야 사진에서 보던 집이 나왔다. 마당이 있지만 사진보다 아담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목소리만으로도 깐깐한 아저씨 소리다. 고시원 관리인과 비슷한 목소리 같기도 하다. 성격은 다르겠지. 달라야 한다.


“저, 오전에 전화드렸던…… 문하생 지망생입니다.”


대답도 없이 문이 덜컹 열렸다. 이 집 주인은 90년대에 꽤 유명했던 만화가다. 고릴라도 그의 만화를 보고, 그림을 따라 그린 적도 있다. 무협 만화로 꽤 유명했는데, 최근 소식을 잘 듣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문화생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더니 내려와 보라고 했다. 요즘 이런 시골에 처박혀서 문하생 생활 하려는 사람 없다고, 일단 내려와 보란다.


현관 문이 열리고 만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왜소하다. 만화 주인공처럼 생겼을 줄 알았는데 예상을 빗나갔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스피드부터 살펴본다.


“네가 그 스피드구나. 다행히 우리집에 마당이 있으니 여기서 살면 된다.”


“얘는 뛰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마당이 없어도 될 거예요.”


“이런, 그레이하운드가 뛰는 걸 싫어해? 허허.”


만화가는 스피드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자, 어서 들어와.” 만화가는 고릴라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내가 말이야, 요즘 그림 솜씨는 죽지 않았는데 여기가 죽어 가지고……” 만화가는 자신의 머리를 손끝으로 톡톡 쳤다. “나도 웹툰인가를 좀 시작해보려 하는데 젊은 감각이 필요해요. 젊은 자네가 배경 그리고 색칠도 해줘야 해. 스토리도 조언해줘야 하고, 돈은 많이 못 주지만, 여기서 살면 돈 쓸 일도 없을 거야. 그래도 최저임금은 맞춰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만화가의 입은 쉬지 않았다. 고릴라가 입을 떼기도 전에 자신의 일을 다 말해줄 듯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만화가가 물었다.


“하늘입니다. 조하늘.”


“아, 그래…… 하늘이.” 만화가는 하늘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손을 한 번 잡았다. “혹시 싸움 좀 할 줄 알아? 내가 무협 쪽에서 벗어나서 실전 격투 만화를 그리고 있는데 말이야, 싸움을 좀 할 줄 알면 포즈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아직 현관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만화가가 한 말들이다. 참, 말이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늘이에게 이렇게 많은 말을 해준 사람도 없는 듯했다. 스피드는 뭐가 좋은지 꼬리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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