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상을 보는 냉철한 철학적 시선」에서 러셀은 변화와 진보는 구별되어야 하며 진보는 윤리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 철학은 경험론뿐이며,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의견을 독단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언제든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면, 스콜라주의·마르크스주의·파시즘 같은 교조주의는 집단 결속력을 가지지만, 비판과 다양성을 억압해 사회적·지적 퇴보를 초래한다. 러셀은 지적인 겸손, 관용,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경험론적 태도가 윤리적으로도 우월하며, 현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변화와 진보는 다른 것이다. ‘변화’는 과학적이고, ‘진보’는 윤리적이다. 변화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진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P.39)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 그 사고방식에서 민주주의와 일치하는 유일한 철학은 경험론*이다. 근대에서 경험론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존 로크는 경험론이 자유와 관용에 대한 그의 견해, 절대 군주제에 반대하는 그의 태도와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히 밝힌다. 그는 우리 지식의 대부분이 불확실하다는 점을 쉬지 않고 강조한다. 이는 흄과 같은 회의주의*적 태도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대할 때 이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P.47)
실제로 자유주의*의 실천적 신조는 나도 살고 너도 살게 하는 것이고, 공공질서가 허용하는 내에서 관용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며, 정치 제도에서 중용을 지키고 광신을 피하는 것이다. (...)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서는 아마도 이 의견이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이러한 제한적이고 독단적이지 않은 의미에서만 민주주의를 옹호할 것이다. (...) 자유주의 관점의 본질은 ‘어떤’ 의견을 갖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의견을 주장하느냐에 있다. 자유주의자는 자신의 의견을 독단적이 아닌 잠정적으로 주장하며,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 자신의 의견을 철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48~49)
스콜라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같은 경험적 기반 없는 교조주의* 체제는 추종자들 간에 매우 강한 사회적 결속력을 이끌어낸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귀중한 구성원들을 박해한다는 단점도 있다. 에스파냐는 유대인과 무어인을 추방하여 몰락했다. 프랑스는 1598년 앙리 4세가 선포한 낭트 칙령을 1685년 루이 14세가 폐지하면서 위그노들이 국외로 이주하는 바람에 국가적 손실을 겪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혐오하지 않았다면 독일은 아마도 원자폭탄을 개발한 선두주자가 됐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조주의 체제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사실에 대해 잘못된 믿음을 포함하고, 광신주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볼 때, 교조주의 철학에 빠진 국가들이 경험론 성향의 국가들보다 더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 마지막으로 경험론은 더 큰 진리라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더 윤리적이라는 측면에서도 추천할 만하다. 교조주의는 지적인 사고가 아닌 권위를 견해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단자들을 박해하고 불신자들을 적대하라고 요구한다. 또한 조직적인 증오를 위해 추종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친절을 억제하라고 말한다. 진리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논쟁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조주의 추종자들은 결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전쟁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 시대에 전쟁은 세계의 멸망을 의미할 뿐이다. (P.54~55)
우리는 좌파건 우파건 그 어느 쪽에서도 교조주의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개인의 자유, 학문의 자유, 상호 관용의 가치를 굳게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었지만 기술적으로는 통합된 이 지구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P.56)
* 경험론은 지식이 이성이나 직관이 아니라, 오직 감각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고 보는 철학 사조다. 관찰과 경험을 중시하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 상태이며, 이후의 경험이 지식을 형성한다고 본다. 대표 사상가로는 로크, 버클리, 흄 등이 있다. 과학적 사고와 실증적 탐구의 기초가 되는 철학이다.
* 회의주의는 지식이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적 태도나 사상이다. 가장 근본적인 형태에서 회의주의는 인간이 궁극적인 진리나 어떤 종류의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비판적 사고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작용하여, 독단주의나 맹신을 경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정치 및 경제 사상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인권 존중,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사상으로, 현대 사회의 정치 및 경제 체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러셀에게 자유주의는 단순히 정치 체제나 경제 시스템을 넘어, 독단에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관용을 통해 타인과 공존하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자세이다.
* 스콜라주의는 중세 유럽에서 발전한 철학과 신학의 체계로,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중심으로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교리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려 했다. 대표 학자로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있으며, 교리의 체계화와 학문적 논증을 통해 진리를 탐구한 전통이다.
* 마르크스주의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제시한 사회·경제 이론으로, 계급투쟁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본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로 보고, 생산 수단의 공유와 계급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 유물론적 역사관과 사회 변혁 이론을 바탕으로 하며, 이후 여러 정치·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 파시즘은 전체주의적 독재를 특징으로 하는 극우 정치 이념으로, 국가와 민족을 절대시 하며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억압한다. 강력한 중앙 권력, 군국주의, 반공주의, 지도자 숭배 등이 핵심 요소이다. 20세기 초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에서 본격화되었으며, 히틀러의 나치즘과도 연결된다. 민주주의와는 반대되는 권위주의적 체제다.
* 교조주의는 일정한 교리나 이론을 절대적으로 믿고, 비판이나 변화 없이 고수하는 태도를 말한다. 새로운 사실이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기존의 원칙만을 고집하는 경향이다. 이는 사고의 융통성을 제한하며,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버트런드러셀 #생각을잃어버린사회 #민주주의 #비판적사고 #경험론 #교육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