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잘못된 사고를 꿰뚫어 보는 힘 : 철학은 무엇을 꿈꾸는가?」에서 러셀은 철학을 전통적으로는 명료한 사고를 향한 집요한 시도로 보았지만, 오히려 교묘하지만 잘못된 사고의 시도라고 풍자적으로 정의한다. 이는 철학이 종종 자기 논리에 빠져 현실과 동떨어진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비판이다.
데카르트는 기존 지식의 불확실성을 지적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확실성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후 그는 신의 선함과 감각의 신뢰성 같은 전제를 덧붙이며 논리를 전개했는데, 러셀은 이를 통해 데카르트가 다시 '근거 없는 확신'으로 돌아갔다고 비판한다.
또한 러셀은 칸트의 철학을 통해 순수 이성의 한계를 짚는다. 칸트는 이성만으로는 신이나 내세, 정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보았고, 인간의 자유 의지 문제 역시 이성적으로는 명확히 밝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철학이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러셀은 철학이 과학과는 달리 일종의 자기주장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즉, 인간의 목적이 우주의 목적과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그리고 결국 세계가 인간의 바람과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낙관주의가 철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반면 과학은 이러한 낙관주의를 포기하고, 대신 인간 이성을 통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현실적인 낙관주의로 나아간다. 러셀은 이러한 과학적 태도가 과거 철학이 보여준 근거 없는 믿음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결국 러셀은 철학이 진정한 지적 탐구라면, 자기 사고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철학은 단지 이론적인 사고가 아니라, 실제 세계를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인식하려는 정직한 지성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은 ‘명료하게 사고하려는 유별나게 집요한 시도’로 정의되어 왔다. 나는 오히려 ‘잘못된 사고를 하려는 유별나게 교묘한 시도’로 정의하고 싶다. (P.96)
데카르트는 스승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어떤 교리도 확실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신은 존재한다. 신은 선하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영원히 속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깨어 있을 때 보는 것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계속된다. 이로써 모든 지적 경계심은 바람에 날아갔다. (P.97~98)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는 순수 이성이 내세나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세상에 정의가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내가 관찰할 수 있는 한 나의 행동은 현상이며, 따라서 원인이 있다. 나의 행동 그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순수 이성은 나에게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으므로 나는 그 행동이 자유로운지 아닌지 알 수 없다. (P.105)
철학은 과학과는 다르게 일종의 자기주장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목적이 우주의 목적과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믿음, 따라서 장기적으로 사건 과정이 우리가 바라는 바와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다. 과학은 이런 종류의 낙관주의를 포기했지만, 다른 낙관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지성으로 이 세계를 우리 욕망이 충족되는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형이상학적 낙관주의가 미래 세대에게 팡글로스 박사의 낙관주의처럼 어리석게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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