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관점이동
'남자친구가 T라서 공감을 안 해줘요', 'T와이프와 함께 사는 이야기' 등 연인관계, 가족관계에서 공감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SNS상 공유된다.MBTI 열풍이 꽤 지났음에도 최근 티라미수케이크(T라 미숙해)라는 노래로 릴스 붐이 있었듯이 'T는 공감을 못한다'는 의견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연인,가족과 같이 가까운 관계에서는 공감받지 못하면 충분히 서운할 수 있다. 그래서 T인 사람들도 훈련을 통해 사회화된 T가 되려 한다. 그렇다면 대인관계의 집합체지만 업무라는 연결고리로 만나는 회사에서도 공감은 중요할까?
근 5년간 조직 내 공감에 대한 언급이 늘어난 것을 체감한다. 조직문화, 팀워크, 리더십 측면에서 심리적 안전감과 함께 공감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많이 논의되고 있고, DEI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다른 구성원의 입장을 생각해 보는 능력을 중요한 능력으로 보는 조직이 늘고 있다. 더 나아가 공감을 포함한 (특히 리더급의) 정서지능을 강조하기도 한다.
언제부터 공감 전성시대가 된 것일까? 핵가족, 1인가구 증가, 저성장 속 경쟁심화 등의 환경이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개인들을 양산한 것은 아닐까. 타인을 공감할 여유가 없어지고 단발성 네트워킹과 파편화된 삶의 증가로 인해 오히려 이해받고 싶은 개인들이 늘어나면서 공감을 원하는 시대, 공감이 잘 팔리는 시대를 만든 것은 아닐까.
[ 우리는 왜 공감할까 ]
진화론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단순한 선호, 취향, 모방행동 등 그냥 해왔던 많은 행동들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해오던 것들이다. 유전자에 축적된 경험 데이터의 결과물이랄까. 공감도 진화론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집단생활을 하는 인간은 타인과 상호작용 하며 짧은 시간에 수많은 정보를 처리해 생존에 유리한 판단과 행동을 한다. 연인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달콤한 디저트를 선물하기도 하며, 직장인은 상사의 표정을 살피며 업무 보고를 하고, 영업사원은 고객의 망설임을 읽어내 구매행동을 유도하는 멘트를 친다. 이렇게 우리는 사회 속에서 상대방이 어떤 상태이고, 어떤 감정 변화가 있으며, 어떤 행동을 취할지 끊임없이 분석하고 추론하며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도모한다.
이런 맥락에서 공감은 정보처리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이다. 공감은 상대방의 정서 변화와 비슷한 신체적 변화를 뇌에서 시연하며 상대의 정서반응을 미리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상대방의 감정과 변화를 예측하면 그에 맞는 말과 행동을 선택해 수월하게 대응할 수 있다. 즉, 공감을 통해 효율적으로 상대와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 공감의 재료는 경험 ]
모든 사람이 공감에 능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공감의 재료는 경험이기 때문에 본인이 경험했던 것에 한해 정서적 공감은 가능하다고 한다. 많은 커플들이 결혼할 때 비슷한 환경의 사람을 선호하는 것도 어쩌면 비슷한 경험 또는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을 때 서로를 더 쉽게 이해하고 공감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공감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공감은 타인과의 정서적 동일시라 할 수 있는데, 직접 경험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 리스트를 가진 사람은 그만큼 다양한 상황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공감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 외에(모든 경험을 해볼 수도 없거니와 비효율적이다) 본인의 감정을 잘 살펴보고 다양한 감정언어들을 통해 감정을 세분화해서 인지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는 육아에 있어서도 중요한데, 공감지능이 높은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화난다와 답답하다, 짜증 난다 등의 감정이 다 다른 감정이며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표현하게 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이다.
[ 공감의 한계와 대안 ]
우리는 본인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살기 때문에 대개 자신이 정답이라는 프레임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오해가 발생하고 착각에 빠지곤 한다. 공감도 마찬가지다. 남의 입장에 서서 감정적 동일시를 시도하지만 우리는 결코 남이 될 수 없다. 경험의 개인차는 늘 있을 수 밖에 없고, 나와 상대의 감정이 100% 일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것이 공감의 한계다. 공감도 결국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자기중심적 해석이기에 상대를 편향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잘못된 공감은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직관적 영역인 공감만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관점이동"이라는 대안(내지는 보조도구)을 가지고 있다. 관점이동은 인지적 추론 능력으로, 내가 경험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과거 행동과 환경정보를 기반으로 상대방의 감정상태를 추론하는 능력이다. 즉, 공감은 타인의 입장에서 느끼는 감정적 참여를 포함하고, 관점이동은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기보단 상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 논리적, 분석적으로 접근해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대부분은 공감과 관점이동을 모두 동원해 상대방과 원활한 상호작용과 사회생활을 도모한다. 그러나 공감 없이 관점이동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사람은 타인을 속이고 해치는 데 큰 죄책감을 못 느낄 가능성이 높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그 사례로, 이들도 관점이동은 가능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오히려 사이코패스에게서 타인의 욕구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관찰된다고 한다. 그래서 사이코패스들이 이웃과 동료 등 주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또는 좋은 사람으로 비친 사례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감정과 연결해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살인 충동이 일었을 때 억제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을 해치고 싶은 욕구가 생겨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해('내가 칼로 이 사람을 찌르면 고통스럽겠구나'와 같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과는 다른 점이다.
[ 회사에서 공감과 관점이동 ]
우리는 공감과 관점이동을 통해 상대방을 파악하고 적절한 판단과 행동을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그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상대방을 파악하고 적절한 대처를 한다는 것은 경험상 알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학창시절을 지나 사회에 나가면 삶의 반경에서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고, 특히 집단 내 다양성 지수가 높을수록 공감과 함께 관점이동을 사용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는 누구나 한번쯤은 기빨리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집단 안에 오래 있다보면 아무리 에너지가 많은 사람도 지친다.
왜 그럴까? 관점이동, 즉 타인이라는 외부환경에 대한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것은 내면적으로 빠르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과정이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에너지 소비가 크고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타인들이 모여 있는 조직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실로 에너지가 많이 드는, 기빨리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고 대인관계를 줄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에너지 소비는 크지만 관점이동 덕분에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공감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회사든,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소통도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직관적 공감'과 '분석적 관점이동'은 사회 구성원이 갖춰야할 노력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감의 재료인 경험의 폭을 넓히고 본인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는 훈련과 함께,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관찰과 추론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조화로운 공동체적 인간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