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요즘 마음이 힘들어"라고 친구/연인/배우자에게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이 돌아왔었는지, 또 나는 어떤 말을 해왔는지 생각해 보자.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분위기에선 마음이 힘들다 하면 "네가 아직 고생을 덜해봤구나"라는 답변을 받곤 했다. 마음건강에 대한 중요성 내지는 관리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이다.
마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의 심리학 역사도 깊지 않다. 30년 전만 해도 심리학은 인기가 적은 전공이었고, 이공계로 유학은 많이 갔지만 심리학으로 유학을 가는 동양인은 거의 없었다.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먹고살기 바쁜데 사람의 마음에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탓일 것이다. 다만 열심히 일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신체 건강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들었고,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하기 위해 신체활동 증진 교과목을 배웠다. 평소에도 “건강하세요”라는 안부 인사를 자주 나누고, 명절 선물로 정관장이 몇 년째 인기 아이템이며, 건강을 위한 다양한 먹거리와 맨발걷기 같은 운동도 유행한다. 이렇게 건강에 진심인 건 한국 전통문화의 특수성과도 연결된다. 한국은 외래문화의 윤회사상이나 천국, 지옥 같은 사후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없고, 사후세계보다 이승에서의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이 보여주듯, 한국인에게는 현생에서의 건강과 장수가 최고의 축복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렇게 신체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반면 마음건강은 상대적으로 무시되거나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됐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국민 대다수가 먹고사는 일에 바빠 마음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모른 채 살아왔다. 그래서 우울증, 불안장애와 같은 정신적 문제가 다수에게 발생한 후에야 그 중요성을 깨닫고 사회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화를 대하는 두 가지 방법]
한국인 다수에게,관찰되는 마음의 병은 화병이다.화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답답함,우울감,불면증,의욕상실 등으로,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로 인해 세로토닌 같은 신경 전달 물질에 이상이 생겨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특히 이러한 스트레스는 고부갈등,가부장적인 가족 관계 등 부당한 상황에서 화를 적절히 풀어내지 못해 발생하는데,한국인 다수가 이러한 화병 스크립트*를 공유하고 있다. 왜 우리는 화병을 한국의 국민병으로 갖게 되었을까?
*사회 스크립트(social script): 행동방식에 대해 문화가 제공하는 지침
일반적으로 화를 다스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화를 줄이고 통제하는 것이고, 둘째는 화를 해소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발달한 상담치료는 환자와 대화하며 화를 밖으로 꺼내 해소하도록 돕는 대증치료라고 할 수 있다. 화가 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건강하게 해소하도록 돕는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화가 나는 것을 다소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과거 유교문화에서 마음은 도덕적 수양의 대상이었다. 특히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사상은 마음을 도덕적 행동의 원천으로 보았고, 이를 통제하고 수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며, 불교에서도 스님의 금욕과 수양의 결과인 사리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마음 건강을 도덕적 수양과 통제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감정에 긍정/부정을 부여하지 않고 모든 감정을 신체가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로 본다.감정을 억누르기만 하면 폭력(외부적)이나 신체 질병/우울증(내부적)으로 폭발한다는 것도 많은 의학/솔루션 예능을 통해 다수의 국민이 이해하고 있다.균형 잡힌 건강한 삶은 명상과 수양을 통해 화를 다스리는 한편,화를 쌓아두지 않고 건강하게 해소할 때 가능하며, 자연스럽게 상담치료이론이 자리잡기 전부터 민간에선 "수다"를 통해 화를 적절히 분출해오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그런데 중장년층의 전유물이었던 화병이 최근 2030에게서 증가했다고 한다.성장과정에서 개인의 자율성과 권리를 존중받았던 이들이 사회에 나가 부당함을 경험하면서 화병을 겪고 있는 것. 이 현상은 청년층이 직면한 구조적 부조리의 문제뿐 아니라 외로움이란 정서를 적절히 다루지 못함이 원인이 된다.
실로 외로운 사람이 늘고 있지 않은가. 1인가구가 늘고,공동체가 와해되고,깊지 않은 단발성 네트워크를 추구하며,연애와 결혼 등 진지한 관계를 포기하는 청년이 늘면서 감정을 터놓을 대상이 없는 이들이 늘고 있다.과거 가족공동체와 연인,친한 친구 관계에서 해소되었던 감정들이 점점 해소되지 못해 마음의 병이나 폭력의 형태로 터지며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마음을 터놓을 이가 없어 전문가에게 비싼 상담치료를 받으며 감정을 해소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과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건강에 관심을 갖고 있었나. 요즘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연애/결혼하기 좋은 상대를 조사해 보면,징징거리지 않는 독립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스스로가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상대방이 부모가 아니기에) 상대방이 고민과 감정을 얘기하는 것을 징징거린다며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무책임한 것 같다.좋은 짝이란 상대의 마음건강에 관심을 갖고 마음을 헤아리는 노력과 정서적 공감을 나누는 대화를 노력하는 사람이 아닐까.
건강한 연인/배우자 관계에서 많이 관찰되는 행동 중 하나는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지 않고 곪기 전에 건강한 대화법으로 푸는 것이라고 한다. 서운함이든 화든 감정을 쌓아두지 않는 관계가 오래간다. 그럼 나는 어떠한가. 서운하거나 화가 나면 꽁해 있진 않은지, 상대방의 마음상태를 궁금해하고 들어보려 하는지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건강에 관심을 갖고, 심정 대화(정보 공유를 넘어, 감정적 공감을 나누는 대화)를 귀찮아하지 않아야 소중한 관계를 건강하게 이어갈 수 있으며 함께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신체든 마음이든 에너지가 드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을 때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