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나는 비혼 주의자에요.

by 안제나

참 어렵게, 어쩌면 무척 쉽게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나는 참으로 가벼운 마음이었다.


이 남자는 예전부터 줄곧 말하곤 했다.


"나는 비혼 주의자예요."


오.

잘 됐군.

나도 비혼 주의자야.


한번 다녀왔으니 비혼 주의란 말이 좀 무색하긴 하다만.

재 비혼 주의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내 인생에 결혼은 한 번이면 충분해 : )


비혼 주의자니까

연애하면서 결혼하자고 덤빌 일이 없으니

또 내가 결혼해 달라며 조를 일이 없으니

우리는 참으로 가벼운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마음의 짐을 조금 덜은 채.


그리고 내가 그에게,

굳이 나는 이혼녀요. 하고 밝힐 필요도 없다 생각했다. 서로 결혼할 생각이 1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연애를 하는 건데 굳이 나의 흠과 치부와 상처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라고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나는 혼자 살았지만 우리 집에 데려올 생각이 단 1도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1.5룸의 오피스텔은 돌이 갓 지나 18개월 됐을 때 헤어진 내 아들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내 집에 남자친구를 초대하면서

내 이혼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내 방 벽면마다, 장식장 선반마다 늘어놓은 내 아들의 사진을 떼는 짓은 차마 엄마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우리 집에 남자친구 절대 안 데려와.

한번 오면 계속 집에서만 데이트하고 싶어 해서,

그러니 우리 집에 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


내 남자친구는 내 분수에 맞지 않게

아주 순하고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에 반문하지도, 반항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마리 순한 양과 같은.

선비 같은 사람.


왜 이혼한 걸 말하지 않느냐고 나에게 되묻는다면

너 왜 그 남자를 속이고 만나냐며 나를 비난한다면

할 말은 없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사람을 속이는 일이며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위인 것을

부정하고 변명할 생각도 없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기에.


다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남녀 사이에서

만에 하나 이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기 불편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의 이혼 사실이 이 손바닥만 한 회사에 널리 퍼져 내 손으로 사직서를 내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면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나를 '고아하다'라고 표현해 주며 '품위 있다'라고 치켜세워주며 나를 마치 대단히 괜찮은 인간인 양 이상화 시키는 그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이미지 그대로 처음부터 우리의 관계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나를 한결같은 이미지로 바라봐 줬으면 하는 마음의

내 욕심일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우리는 그렇게 가볍다면 가벼운,

그러나 내 마음은 바윗 덩이를 얹어놓은 것 마냥 무거운 비혼 주의들의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D+1


일요일 어색했던 고백을 마친 뒤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다시 직장동료로, 다른 직원들에겐 비밀을 간직한 채 월요일 아침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월요일이었지만

그와 나에겐 특별한 월요일이었다.


상당히 어색했다.

대학시절 4년 내내 CC를 하면서

한 공간에서 연애하면 엄청난 피로감이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는데,

역시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그와 나, 그리고 직장 여자 동료 한 명, 남자 팀장님 한 명은 점심 메이트였다.

정말 그냥 무척 친한 사이였단 말이다.

그런데 D+1이 되어 나타난 그는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불편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난 사실, 그 수개월 동안 그냥 남동생 같기만 했던 친한 직장 동료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인 건지,

나도 그를 이성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

도무지 내 마음을 알 수 없어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괜한 짓을 한건 아닌지 내심 후회도 밀려왔다.


그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업무시간 내내 곁눈질을 하며

내 동태를 살폈다.


그래도 우리는 남들처럼 근무시간에 카톡을 하고

퇴근 후에는 손을 잡고 저녁을 먹으며

소소한 데이트를 이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날수록 미약했던 후회와 혼란은 점차 사라졌다.


코로나 거리 두기로 이제 막 갓 사귀기로 한 연인이 갈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늘 회사-집, 회사-집 무한 반복이었던 그와 나는

저녁이라도 함께 먹을 요량으로 이틀에 한번 꼴로

근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집 앞까지 바래다주거나 우리 집 근처의 공원에 가서 잠깐의 산책을 하고 헤어지는 평범한 데이트를 이어갔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 지 5일차, 금요일 밤.

그날은 비가 무척이나 많이 쏟아졌다.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6월 초였지만 장마가 시작되긴 이른 시기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우리는 이제 막 시작한 뭇 연인들이 그러하듯

집에 가고 싶지는 않은데 코로나 거리 두기로 가게들이 일찍 영업을 종료하는 까닭에

카페조차 갈 수 없는 상황이며,

아늑한 우리 집에 남자친구를 끌어들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별수 없이 집 근처 공원의 천막 아래 앉아 손을 꼭 잡고 이른 초여름 밤의 추위와 맞서며 그렇게 사랑을 속삭였다.


칠흑같이 까만 밤, 가로등도 별로 없는 동네 공원에 앉아 지긋하게 나를 바라보는 일곱 살 어린 남자친구의 눈빛에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엄청난 속도로 뛰고 있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표현은 비단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이었으리라.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불혹의 마흔 살 여자였음에도 오랜만에 찾아온 진정한 사랑에 나는 또 한 번 흔들리는 가벼운 여자가 되었다.


왠지 금세 입술을 갖다 댈 것 같은 눈빛인데

또 그러지는 않았다.

전혀 떨려 보이지 않는 단호한 눈빛인데

나를 안지도 않았다.

그저 내 눈을 뚫어버리겠다는 기세로

오랜 시간 나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은 연애 전 동료였을 땐 모태솔로인 줄 알았는데, 그만큼 순수해보였는데, 사실은 대단한 선수였던 것이다. 틀림이 없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조금은 느끼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도 달달했던 그 눈빛으로 자기보다 두 뼘은 작은 작은 나를 계속 내려다보며 우린 아무 말 없이 빗속의 눈 맞춤을 오랜 시간 이어나갔다.


모든 오감이 반응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절절한 눈빛과,

사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는데 청각을 자극해오는

시원한 빗소리와 뜨거운 심장소리.

그리고 공원에 심어둔 풀 포기들은 풀 향기를 한껏 뿜어내며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하던 터였다.


그렇게 그는 내게 천천히 다가와

내 심장소리를 오롯이 느끼며

내 입술에 그의 입술을 포개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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