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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Nov 03. 2019

알래스카 봄 이야기(6)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눈 녹고 얼음 녹는 봄에는, 빙하기가 끝나고 알래스카를 이어주던 베링해의 얼음다리가 녹아버린 사건(?)을 한 번쯤 상기하고 애도해주는 것이 좋다.

붉은 선 안이 빙하기에 베링해가 얼어붙어 러시아와 알래스카 간에 얼음다리가 놓였던 곳이다.

알래스카를 미국이 러시아에서 헐값에 사들인 것은 다들 아는 일이지만, 러시아는 한국 북쪽으로 중국을 살짝 건너서 있는 나라이고, 알래스카는 그 동쪽 끝에 바로 붙어 있으며, ice age 빙하기에는 알래스카와 러시아가 얼어붙은 베링해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모르는 분이 계신다.

빙하기가 끝나 이 다리가 서서히 녹아서 끊어졌을 때, 갑자기 길이 없어진 사람들과 동물들의 당혹감을 생생하게 그린 다큐멘터리가 <아이스 에이지>다.(아님)


이 시기에 여러 동물과 함께 인간들도 이 경로로 아시아로부터 ‘걸어’ 넘어와 미 대륙을 점령했고 (그래서인지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미국 원주민보다 동양인 느낌을 주는 얼굴이다), 머지않아 성공적으로 많은 동물을 가죽과 식량을 얻을 목적으로 멸종시켰다고 하니 인간만 한 포식동물이 없다. (공룡 멸종이 운석이 아니라 인간이 원인이라는 학설도 있다. 인간이 심지어 티라노사우루스와 트리케라톱스 맛집을 차릴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그렇게 못 믿을 만한 일은 아니고)


몇 년 전 알래스카의 세라 페일린이라는 공화당 의원이 매케인의 부통령 후보 지명으로 잠깐 떴을 때, 외교정책을 얼마나 잘 아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 집에서는 러시아가 보인다고!’하고 외치곤 했지만, 사실 그가 사는 곳은 알래스카 동남단 해안가라서 보일 리가 없고, 서부 끝에 little diomede라는 곳에 가면 실제로 겨우 80km 떨어진 러시아가 보인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거리(926km), 그리고 페어뱅크스에서 보이는 알래스카 산맥(121km)보다도 알래스카에서 러시아 '땅'이 더 가까운 것이다.

러시아의 주요 도시는 한참 서쪽에 붙어있기 때문에 여기서 러시아를 놀러 가려면 동부로 돌아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가야 하는 분위기라는 게 함정이지만.

러시아는 냉전기에 미국과 오랜 숙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알래스카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기지들이 배치되었던 것이고, 지금도 알래스카가 북한을 포함한 아시아에서  가까운 곳임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래스카는 전략적인 요지다.

적대국을 견제하는 데는 가까운 기지를 점점이 심어 놓는 게 기동성에 중요한 법이다. 그래서 항공모함도 떠 있는 거고, 아이티와 미국‘령’(이라고 쓰고 식민지라고 읽는다)도 미국이 돌보는 척하면서 이용하고 있고, 한미 연합 스피리트도 열리고 있는 거다.

지금도 대통령 등 미국 주요 인사가 한국 등 아시아 국가를 들렀다 올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알래스카 공군기지에서 주유하고 쉬었다 가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알래스카에 산재한 크고 작은 공군기지는, 미군 부대가 이태원 상권에 큰 영향을 미쳤듯이 알래스카 경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알래스카 주립대에서는 에스키모들을 가르치냐’는 또 하나의 어리석은 질문에는 그보다 현전직 군인 학생들이 많다고 답하겠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알래스카의 인구 분포는, 65% 이상이 백인이고, 원주민은 14% 정도, 아시아인은 6% 정도 되니까 에스키모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알래스카는 에스키모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인상 또한 잘못된 것이다.


또한, 군대가 들어가면 군 물량을 수송할 수단을 확보해야 하므로 공병이 제일 먼저 들어가 길을 닦는 게 순서다. 우리가 지난 20년 동안 40여 개 주의 주요 도로와 간선도로를 달려봤지만, 알래스카 고속도로만큼 보수가 잘되어있고 매끈한 고속도로도 드물다.

 

페어뱅스와 앵커리지 간은 물론, 페어뱅크스에서 북단까지 가는 길도, 동쪽 캐나다로 해서 lower 48로 육로로 넘어가는 국도도, 친한 이웃집 할머니와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놀민놀민 갈 정도로 중간중간 숙박시설과 먹을 곳도 잘 되어있다고 들었다.

물론 사잇길로 트래킹 하는 곳이나 사냥 지역이나 개인 주택으로 들어가는 흙길이 있을 수 있고, 한적한 숲길이나 산악자전거 타는 도로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어디서나 마땅히 흙길이어야 하는 길이다. 외국인이 잠깐 들러다 가서 한국의 도로는 다 시골길 같다고 말하고 다니면 좋겠는가.

그러니, 고작 앵커리지에서 페어뱅크스 오는 길을 ‘험난하다’라고 표현한 안내 책자를 만나면 믿고 거르시기 바란다.


북한 덕분에(?) 미국 '영토' 중 가장 가까운 것이 알래스카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정은이 형이 화나면 이래 봬도 우리가 제일 위험하다.

심리적인 거리를 형상화해서 그러는지 알래스카에는 ‘머나먼’ 같은 수식어를 자동 완성 기능으로 붙곤 하는데 (알래스카와 하와이가 미국인 줄도 모르는 사람은 차치하고), 한국에서의 거리로 말하자면 알래스카가 미 동부, 파리, 런던보다 가깝고, 워낙 크기 때문에 타임 존이 그 이름도 찬란한 독자적인 ‘알래스카 타임’ 존이라서 (캘리포니아 주가 속한 태평양 타임 존보다 한 시간 빠름) 한국과의 시차도 미 대륙 중에서는 제일 적게 난다. 가끔 밥 먹고 소화하면서 세계 지도 한 번씩 들여다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아는 것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긴 하다.


여담인데, 알래스카 사람들은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의 출마 실패 이후 별로 자랑스럽지 않은 행태들로 알래스카가 상당히 모냥 빠지게 되었다고 느끼고 있다. 그전에는 그나마 나름 터프한 느낌이라도 나던 것이, 이제는 ‘뭐야, 그 이상한 세라 페일린 나온 데 말이야?’ 이 모양이 되었다고 투덜거리는 형편이다.

즉, 알래스카 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으면 ‘추운 데서 어떻게 사냐’고 묻는 것보다는 세라 페일린 얘기를 꺼내는 편이 빠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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