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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Nov 04. 2019

알래스카 여름 이야기(1)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백야

하지 summer solstice)


페어뱅크스 기준, 6월 20일 하지에는 해가 져 있는 시간이 네 시간 정도뿐이다.

어둑어둑하지만 완전히 어둡지는 않은 해돋이와 일몰이 앞뒤로 있어 거의 24시간 밝은 것처럼 보인다.

이는 북극에서 동지와 반대로 해가 지려다 다시 올라가는 모양이다. 페어뱅크스는 이정도는 아니고 네시간 정도 잠시 지긴 지는데 지평선 바로 아래 있기 때문에 어스름하다.

그렇다고, 스티븐 킹 원작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인솜니아’에서처럼 알래스카 주민은 여름마다 모두 밤에 눈을 껌뻑이며 불면으로 괴로워할 것으로 생각하시면 오산이다. 어린 시절 한여름에 훤한 마루에서 대자로 누워 달게 잠들어 본 적 다 있으실 것 아닌가. 영화에서도 알 파치노가 잠 못 든 이유는 내면의 이유였기도 하고 사람이 반드시 조용하고 어두워야만 잘 잔다면 수업시간에 잠든 학생들은 다 어떻게 설명하겠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시계와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밝기가 일치하지 않으니까 문득 좀 신기하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위도가 높아서 여름에 해가 지평선 밑으로 떨어지는 기간이 짧으니까 낮의 시간이 좀 많이 길어져 있어 실제로 하늘에 해가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밝을 수밖에 없는 거지 이유 없이, 느닷없이‘이상하게’ 훤해지고 그런 건 아니니까 오로라처럼 어쩌다 일어나는 놀라운 ‘현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름에도 시간 상관없이 먹구름이 끼면 불을 켜야 하듯이, 필요한 대로 수면안대나 암막 커튼을 쓰거나, 늦게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사부작 거리며 하루를 길게 쓰면 되니까 따로 별다른 ‘사건’이 되지는 않는다.


처음에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의 첫마디가, 오 밝고 좋구나! 가 아니라, 왜 이렇게 집구석이 지저분해! 였다고 하듯이, 하지의 일출과 일몰 시간에는 해의 고도가 낮은 상태에서 오래 유지되기 때문에 작은 먼지 하나도 그림자 크기가 엄청나게 길어져서 나는 오히려 그게 조금 괴롭다.  


하지에는, midnight sun festival이라고 해서, 매년 1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을 자정에 열리는 야구 경기로 기념하고, 밤의 마라톤 경기를 하고 (달 대신 해가 있으므로 엄밀히 말해 달밤의 체조는 아니다), 다운타운에서는 각종 공연과 알래스카 재배 채소, 먹거리들과 수제품 마켓이 서는 페스티벌이 열린다.

알래스카가 처음에 금과 석유로 흥한 곳이다 보니 농사지으러 오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적으니까, 초기에는 주 정부 차원에서 미네소타 등 기후가 비슷한 환경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초대해 정착하도록 돕기도 했다고 하는데, 해가 기니까 파종을 오히려 조금 일찍 2월 말부터 시작하면 이모작도 가능하다고 한다.

농사는 온도만 중요한 게 아니라 토양과 강수량도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기온이 높은 것이 농사짓기 좋은 조건은 아니고 말이다. 귀농이나 할까,라고 쉽게 말하는 분들은 농의 ㄴ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대충 맞다고 본다. 물론 비닐하우스를 쓰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유제품과 달걀 포함, 보리와 귀리, 건초, 를 생산한다고 한다.


여름에는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파머스 마켓에서는 토마토나 호박, 순무, 오이 등 주민들이 각자 집 마당에서 키운 농작물을 판매하기도 하고, 꽃과 특산품, 북유럽 이민들이 팔고 있는 맛있는 파이와 빵도 맛볼 수 있다. 러시아 인형같이 생긴 볼이 붉은 둥근 얼굴을 가진, 영어도 서툰 부부가 여는 한 부스의 이름 모를 빵들은 정말 너무너무 맛이 있어서 이 마켓이 서지 않는 겨울에는 종종 그들의 안녕이 궁금해진다. 나는 이기적인 사람

딱히 신토불이인지는 모르겠고, 미국에도 그 지역 농산물을 팔아주자는 취지에서 eat local 운동이 있다. 이 로컬의 범위가 산지로부터 161㎞ 반경이라니 (한반도 동서 길이  193km) 아는 언니가 ‘농약 하낫토 안 쓰고’ 키웠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지만, 가격만 대충 맞으면 나도 이 지역에서 생산했다지만 왠지 더 시들해 보이는 채소를 먹어주려고 하는 편이다.


특별히 식물을 잘 다루는 green thumb도 아닌 나도 깻잎, 고추, 오이 등은 한철 너끈히 키워 먹는데, 화분에서 하는 것이라 그건 알래스카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한국에서 겨우내 실내가 아무리 따뜻해도 농사가 되는지 한 번 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몰라도 식물들은 다 생각이 있다.


다운타운에 상설 동물 가죽, 털을 파는 상점이 있긴 하지만, 페스티벌이나 파머스 마켓에는 간혹 원주민들이 통 늑대나 여우 털가죽을 걸어놓고 저렴하게 팔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사냥이나 육식이나 동물 학대를 반대하시더라도, 원주민들에게 이 동물 가죽의 사용과 판매는 생계였다는 것을 고려하시고, 이왕 벌어진 일(!)의 결과물은 추모 차원에서라도 한번 쓰다듬어보시는 것도 좋겠다. 믿어도 좋은데 살아 있는 늑대를 쓰다듬을 일은 없을 것이니까. 늑대의 큰 놈은 발이 사람 손바닥 만한 것이 정말이지 거대하고 위대하고 멋있고, 후덜덜 무섭다.


평상시에는 밥도 잘 안 사주면서 꼭 어디 놀러 간다면 기념품 사 오라는 친척을 위해서는 슈퍼마켓이나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기념품을 위한 기념품 = 마데인쉬나a.k.a. made in China’을 사면 되지만, 뭔가 ‘진짜’를 원하시거나 ‘살다 살다 내가 알래스카까지’ 와서 삶을 돌아보니 마음을 담아 감사하고 싶은 사람이 떠 올랐다면, 페스티벌이나 울루 팩토리, 페어뱅크스의 파이오니어 파크 공원 내에 개척시대 식으로 지어놓은 상점에서 원주민이나 지역주민의 수공예 작품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독특하긴 하지만 원주민들이 전통방식으로 뿔을 깎아 만든 것이라서 가격이 높은 편이다.

동물의 뼈나 뿔들로 조각한 원주민들의 수공예품은 토템 신앙이 아직 묻어 있는 동물의 모습이 많고, 선이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것이 다정하게 느껴진다.


코리안을 위한 품질 좋은 녹용, 녹각, 상황버섯 등도 있으니 한국 여행사를 따라오셨으면 가이드가 어련히 알려드릴 것이고, 개인으로 오셨으면 앵커리지에서 한국 마켓을 찾아가시면 된다. (기타 선물은 ‘무스와 산책을’ https://brunch.co.kr/@slsaznv/8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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