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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Oct 24. 2021

이동진 평론가를 좋아하는 이유

인생영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빈도보다는 밀도가 중요할 때가 있다.


  10년도 더 된 대학생 때, 운 좋게 이동진 평론가의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그렇다.

  워낙 인기 강의라 학생들의 수강신청 전쟁이 치열했는데, 그날따라 마우스를 현란하게 두들기던 나의 클릭 속도가 빨랐던 덕택이다.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이동진 평론가의 저서를 가져와 사인을 받을 때도 멀찍이 서있기만 하던 수줍은 학생이라 그와 대화는커녕 눈도 제대로 맞춰본 일이 없었지만, 그에 대한 나의 내적 친밀감만큼은 이미 최애 교수님 못지않았다.


  살면서 그렇게 사려 깊고 유려한 언어로 말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비록 나는 수많은 학생들 틈에 끼어 치열한 질문 시간에도 눈만 말똥거리는 배경 학생급의 미미한 존재감을 뽐냈지만, 매번 다른 영화를 통해 새롭게 생각할 지점들을 짚어주는 그의 수업을 누구보다 기다리는 학생이기도 했다.




  이동진 교수님의 수업을 통해 접했던 영화 중 단연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였다.


  겨울로 접어든 시골의 소박한 분교쯤으로 보이는 공간에 사람들 몇몇이 모여든다. 이곳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잠시 머무는 공간으로 일주일 안에 자신이 천국으로 가져갈 단 하나의 기억을 골라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여기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손님들이 고른 기억을 영화로 재현해주고, 영화가 상영되는 날 이곳에 들렀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추억을 안고 천국으로 떠난다.


  실상 이 영화는 비극적인 세계관을 품고 있다. 이곳의 사후세계는 착하게 살았으면 천국, 나쁘게 살았으면 지옥이라는 보상적이거나 징벌적인 체계가 없다. 더군다나 삶의 기억 중 단 하나만 가져갈 수 있다는 설정은 그 이외의 기억이 품고 있는 고통이나 아픔을 전제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죽음 이후의 세상은 무구하고 다정해서 어쩐지 위안이 되었다. 사람들이 선택한 기억을 소중하게 종이에 옮겨 적는 펜의 움직임이나 라디에이터가 돌아가 김이 서린 유리창이나 백열등 특유의 노란빛을 보고 있자니 죽어서 이런 곳에 간다면 그다지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진 교수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당신이 천국으로 갈 때 단 하나의 기억을 가져갈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고르고 싶나요?"




  얼마 후, 나는 시골집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든 이 질문이 생각났고, 엄마에게 <원더풀 라이프>를 소개하며 같은 질문을 했다.


  "엄마는 단 하나의 기억을 고른다면 뭘 고르고 싶어?"

  "음...... 엄마는 국민학생 때. 선생님 집에 찾아가서 친구들이랑 숙제하면서 놀던 기억이 어떠려나. 살면서 어렸던 그 시절이 제일 좋았거든."

  "엄마는 나랑 여행 갔을 때도 좋았다고 했잖아."

  "그럼. 그때도 좋았지. 좋았어......"


  선택에 있어서 두 번째로 고르는 것은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엄마가 고른 최고로 소중한 기억에 내가 없다는 것이 나는 못내 서운했다.



  하지만 엄마의 대답을 곱씹어보며 오히려 나는 '엄마'로서가 아닌 자신의 삶을 오롯이 짊어진 한 사람으로서 엄마를 바라보게 되었다. 엄마는 <원더풀 라이프>가 지닌 비극적 세계관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만큼 덜어내고 싶은 기억들이 많다는 의미였을지 모른다. 엄마가 선택한 기억에 내가 없어도, 그래서 엄마가 나의 엄마가 아니게 된다고 해도 온전히 엄마가 행복한 기억을 선택한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끼니 걱정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반찬 투정이 아니라 엄마와 내가 서로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답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 돌이켜보면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기억인지 모른다.




  빨간 안경 너머로 이동진 교수님이 화두 하나를 전해준 이후로 나는 항상 그것을 마음에 품고 산다.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마르고 마음이 팍팍해지는 날들이 찾아올 때면 나는 그 질문을 꺼내어 나를 달랜다. 산다는 것은 가장 힘든 경험을 갱신해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내가 결코 잊고 싶지 않은 가장 멋진 기억을 갱신해가는 과정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는 게 썩 괜찮은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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