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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잠 Oct 15. 2021

택시기사 열전

택시기사 한번 안 만나본 사람은 없다.

  자동차가 없는 나에게 대중교통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절친들이다. 등하교와 출퇴근에는 주로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없어 다급할 때나 초행길에 놓였을 때, 버스도 끊긴 늦은 시간일 때처럼 지원군이 필요할 때면 택시는 대중교통의 간극을 메워주는 요긴한 녀석이었다. 이렇게 택시에 입문하게 되자 상황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택시의 편리함에 넘어가 비싼 택시비를 홀린 듯 지불하고 마는 택시의 노예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택시 앱 하나쯤은 필수가 아닐까.




  그러다 보니 그간 만나본 택시기사님들 수는 어림짐작도 안 될 만큼 많고도 많다. 당연히 그 얼굴을 다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꽤나 다양한 유형의 택시기사님들을 만난 것만은 분명하다.


  기본적으로 거리의 정치 평론가 기사님들은 도처에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 정치인 전체에 대한 불만을 활화산처럼 터뜨리는 기사님부터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의 열렬한 지지자인 기사님까지 정치 이야기에 끝은 없고 이를 다루는 택시기사님들의 스펙트럼 또한 넓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한번도 택시기사님과 정치를 주제로 즐거운 담소를 나눌 준비가 돼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 투표를 마치고 투표소 앞에서 택시를 탔을 때, 누구를 찍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기사님이 계셨다. 불행히도 택시기사님과 나의 정치성향은 불일치했고 심지어 나는 기사님께 왜 그 사람을 찍었냐며 좀 혼나기까지 했다. 우리의 동행은 불편하고도 씁쓸한 가시방석이 되고 말았다.



  두 번째로 개인사 스토리텔러형 기사님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사회적 기준에서 꽤나 괜찮은 자식들의 스펙을 열거하며 자식농사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시는 분들이 가장 많았고, 택시기사 이전에 거쳤던 본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나 택시기사로 살아가며 느끼는 기쁨과 회한 등의 감정을 나누고자 했던 분들도 계셨다.

  아직 신입사원이던 때, 대차게 늦잠을 잔 덕분에 급하게 택시를 타고 출근한 날이 있었다. 덜 마른 머리는 신경도 못 쓴 채 쿠션 화장품의 퍼프로 가열차게 볼을 두드리는 나를 백미러로 쓰윽 보시던 기사님께서 입을 여셨다. 그리고 그 와중에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혼기가 찬 본인의 아들을 한번 만나보라며 선 자리를 주선하시는 것이었다. 나의 몰골과 기사님의 속사포 같은 아드님 소개 멘트와 갑자기 어딘가에서 귀가 간지러울 기사님의 아드님과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혼란스러운 출근길이었다.



  그 외에 극히 소수이지만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례도 있었다. 비하와 폭력의 언어들로 택시 안의 공기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기사님도 계셨고, 가까운 거리를 갈 거면서 터미널 앞에서 기다리는 택시를 왜 잡아탔냐고 거스름 돈인 동전을 집어던지는 기사님도 계셨다. 그때마다 나는 한동안 택시를 탈 수 없었지만, 다시 또 택시 승객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좋은 택시기사님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좋은 택시기사님이라고 하면 반드시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벌써 10년쯤은 된 일이다. 요즘처럼 산뜻한 가을날이었고, 주말의 오후였다. 내가 무엇을 위해 외출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바람에 날리던 택시기사님의 백발머리만큼은 기억이 난다. 약간 열린 차창을 통해 부드러운 가을바람이 불어 들었고 기사님께서 불현듯 말을 꺼내셨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죠? 이렇게 좋은 날은 유리병 같은 데 담아놨다가 언제든 그리울 때 다시 꺼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 목소리는 휴대폰 화면에 파묻혀있던 내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려놓았고, 나는 비로소 진짜 가을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 하루를 감사하게 만드는 근사한 말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기사님께서 가을에는 전어랑 대하가 제맛이라거나 본인이 소싯적에 문학소년이었다는 뒷얘기를 주르륵 덧붙이셨다면 감동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기사님은 어떤 말도 더하지 않으셨다. 내가 내릴 때 활짝 웃으며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인사를 보내주셨을 뿐이다.



  오래된 기억이다. 하지만 그날의 행복한 기운은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남아 가을날이면 더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택시를 탈 일이 생기면 그때처럼 멋진 기사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해보곤 한다. 찰나의 만남이, 한 마디의 말이 얼마나 오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지를 나는 택시기사님께 배웠다. 어딘가에서 오늘도 운전대를 잡고 계실 그 기사님께 오늘 하루가 10년 전 그날의 날씨를 다시 꺼내놓은 듯 멋지고도 멋진 날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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