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잠 Oct 15. 2021

쭈구리라서 사랑스럽다.

쭈구리의 강력한 매력에 대해

  결혼을 한 지 4년이 다 되어가지만, 나에게 내 짝은 여전히 알아갈 부분이 더 많은 흥미로운 사람이다. 결혼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는 부정적이기까지 했던 내가 내 손으로 혼인신고서에 사인을 하고, 골치 아픈 일 백만 가지가 모여있는 결혼 준비까지 포기 없이 미션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만 통하는 짝꿍의 독특한 매력 덕분이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껴 데이트를 막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우연히 중고등학생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동아리 활동이나 학교 축제에 대한 추억을 그에게 물었다.

  "나 학생 때 쭈구리여서 뭐 특별한 활동 안 했던 거 같은데. 친구도 별로 없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평온한 목소리도, 눈을 찬찬히 끔뻑이는 표정도 완벽했다. 그는 내가 거의 만나본 적 없는, 그래서 전형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성인이 된 후, 10대 때나 학창 시절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 내가 아는 사람들은 열에 아홉 으리번쩍한 과거를 자랑했다. 인기가 많고 어떤 무리의 친구들과도 두루 어울리는 소위 잘나가는 학생이면서도, 놀 땐 놀지만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의 예쁨까지 받는 아이. 심지어는 여기에 싸움을 잘했다는 에피소드가 달라붙기도 했다. 진짜였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학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 자랑에 일말의 미화나 허세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는 재미있지만 어딘가 껄끄러웠다. 교실 안의 완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이야기는 화자의 폭력적인 면모를 은연중에 드러냈고, 자신의 과거를 지나칠 정도로 완벽하게 그려내는 모습은 오히려 낮은 자존감을 감추려는 의도로 읽히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또한 과거를 꾸미고 부풀려 이 대화의 판에서 밀리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욕망이 고개를 들 때 나 자신이 못나게 느껴졌다. 그게 싫었다.



  나의 데이트 상대는 조금 달랐다. '쭈구리'라는 단어를 말할 때 약간의 부끄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를 꾸미고 싶은 욕심도, 학창 시절의 불만족스러운 모습에 대한 그늘도 없었다. 그 말이 나에게는 오히려 단단한 자존감으로 느껴졌던 이유이다.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본 끝에 나는 손바닥을 내밀며 호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와! 나도 쭈구리였는데. 우리 하이파이브해야겠다."




  그렇게 쭈구리 연합을 결성한 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쭈구리로서의 정체성을 소중히 지켜오고 있다. 그 덕분에 부유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친구가 많지 않은 것이, 지독한 집순이이자 집돌이인 것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특성인 것과 별개로 쭈구리 간의 사랑스러운 공통점이 되어 하이파이브를 더 많이 할 이유가 되고 있다.

  그래서 나의 결혼생활은 그가 쭈구리로 멋있게 살도록 응원하는 과정이자 나의 자존감을 천천히 어루만지는 시간들이기도 하다.

이전 03화 좋은 사람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