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가지다!”
서울 촌년인 나는 스무 살 무렵에 강촌 어드메 밭둑에서 가지를 처음 보았다. 시장에 있는 가지 말고 가지에 달린 가지를 말이다.
너무 신기해서 친구들에게 얘들아, 이거 좀 봐, 손으로 가리켰는데 가지는 보지 않고 나만 멀뚱하게 바라봤다.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다들 촌에서 올라왔나 보다.
텃밭에 가지를 심었다. 다른 작물과 비슷하게 10개 정도였던 것 같다. 가지를 처음 심어 보는 티를 있는 대로 낸 것이다. 가지는 4개만 심어도 한집에서 넉넉히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열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농사 초보인 우리는 얼룩덜룩한 가지 몇 개씩밖에 얻지 못했다. 가지치기도 해주지 않고 대를 세워주지도 않아서. 다음 해에야 제대로 열렸는데 역시 너무 많았다. 돌아서면 가지가 열려있었다. 엄마 말대로 살살 뒤로 물러나야 하려나 심각하게 고민했다(한창 클 때였다. 엄마, 돌아서면 배가 고파, 그랬더니 엄마는 말했다. 돌아서지 말고 살살 뒤로 다녀!).
쪄먹고 볶아먹고 무쳐 먹어도 냉장고에는 항상 가지가 있었고 가지 나무에도 항상 가지가 달려있었다. 연하고 부들부들할 때 따야 하는데 집에 있는 가지를 생각하니 딸 수가 없어 가지는 자꾸만 크고 단단해져 갔다. 이건 뭐, 음... 뭔가 19금이다. 아무튼 너무 여문 가지는 장아찌를 담갔다.
가지는 밭작물 중에서 가장 관상용으로 좋다. 일단 매달린 가지가 빤짝빤짝 윤이 나는데 그 윤기가 경탄을 자아낼 정도다. 생명이라는 게 이렇게 빛나는 거구나. 나도 저렇게 빛나던 때가 있...(었나?) 가지 잎은 손바닥보다 넓고 길쭉한 편인데 열대식물 같은 신비로움이 있다. 보랏빛이 그 신비로움을 더한다. 우리는 농장에서 식사할 때 꼭 가지 잎을 따다가 수저받침으로 썼다. 받침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그 이파리 하나가 주는 싱그러움이 좋았다. 꽃은 또 어떤가. 가지를 못 얻어도 꽃을 본 것만으로 충분할 만큼 예쁘다. 보랏빛 중에 가장 소박한 색을 띠고 있다. 가지의 크기와 가지 잎, 가지 줄기에 비해 너무 소담한 거 아닌가 싶게 작은데, 그래서 더 눈에 띈다.
어른의 맛이라고 부를 만큼 가지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없다. 나도 그랬다. 물컹한 맛이 싫었다. 엄마가 국 간장으로만 양념을 했는지 짜기만 했다. 어느 날 식당에서 가지무침이 나왔는데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부터 가지 반찬이 나오면 제일 먼저 젓가락이 가는 나를 발견하고 아, 어른이 됐구나, 했다.
가지는 가지가지로 맛있는 요리 재료가 된다. 적당히 찌고 적당히 물기를 짜서 무치면 양념 맛과 함께 보드라운 식감이 일품이다. 볶아도 맛있고 구워도 맛있고 부쳐 먹어도 맛있다.
가장 놀라운 가지 요리는 튀김이다. 마시멜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살살 녹는 맛이다. 식당에서 먹는 걸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서 직접 해 먹었다. 하필 너무 더운 날이었다. 가지가 한창때이니 당연히 더울 수밖에. 그래도 가지튀김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신나게 튀겼다. 부엌과 냄비는 엉망이 되었지만, 속이 어찌나 뜨듯하고 입맛이 살아나던지. 그날 10년 먹을 가지튀김을 다 먹은 듯하다.
이제 간소하게 해 먹는다. 새로운 도구를 찾아냈다. 바로 와플 팬이다. 가지 요리에 최적이다. 어슷썰어서 꾹 눌러 굽고 간장에 섞으면 된다. 찌고 짜고 자시고 할 게 없다. 굽는 거라 적당히 즙을 말려준다. 가끔 텃밭에서 가지를 달랑 하나 가져올 때가 있다. 그걸 찌고 짜고 하려면 번거로워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버려지기도 한다. 와플 팬은 그런 때 적은 양을 요리하기에 딱 좋다. 양념간장을 좀 많이 해두었다가 한 숟갈 넣고 젓가락으로 훌훌 비비면 된다. 아니, 양념장이 아니라 그냥 간장에 찍어 먹어도 된다. 이렇게 간단한 요리라니. 그 뒤로 가지만이 아니라 어묵이나 호박도 기름 없이 구워서 간장에 찍어 먹는 초간단 요리를 즐긴다.
가지를 검색해보면 뜻하지 않은 것들이 발견된다. 우선 <가지>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고 한다. 가지를 소재로 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단편집이라고 한다.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또, 터키어로 전사를 가지라고 한단다. 특히 현대에는 참전용사를 주로 일컫는데 한국전 참전용사는 코레 가지다.
가지에 관한 옛날이야기도 있다. 옛날에 방귀를 잘 뀌는 며느리가 있었는데 하루는 방귀를 막기 위해 잠자기 전 똥×에 가지를 끼워 두었다. 그날 밤 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 부엌에 있는 가마솥을 훔쳐 나가려고 할 때 며느리 뱃속에서 부글부글하던 방귀가 일시에 터져 나오며 가지가 튕겨 날아갔고 커다란 방귀 소리에 도둑이 놀라 가마솥을 내던지고 달아났다고 한다.
흔한 방귀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들은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튕겨 나간 가지가 옆집 과부 집으로 날아갔고 과부가 에구머니나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끝난다(옛날이야기는 끝이 잘 기억이 안 난다. 마구 웃어대던 것만 기억하고 마지막은 뭐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겠지). 지금 생각하니 음란마귀가 씐 어른들이 살을 마구 붙인 것 같다.
농사 정보도 있다. 가지는 첫 번째 꽃이 피는 바로 아래의 가지가 매우 힘이 좋게 자란다. 가지를 기를 때는 첫 번째 꽃 아래의 가지 2개와 원줄기를 포함하여 3가지를 기르는 것이 좋다. 다음 백과에 나오는 가지에 대한 설명이다. 남편과 함께 농사 정보를 찾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보가 터졌다. 우리는 이걸 몰라서 가지가 무성하도록 그냥 뒀다가 농사를 망해 먹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정보 앞에서 왜 큭큭대는 건지... 아무래도 가지는 외설적이다. 자꾸만 글이 19금으로 가려 한다. 그만 마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