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맛, 옥수수

by 천둥

내게 한 고랑의 땅이 있다면 옥수수를 심겠다. 옥수수는 딱 한 개의 열매를 기대하고 심는 것이기 때문에 텃밭 작물로는 경제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바로 따서 먹는 맛으로는 최고다. 다른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나는 옥수수를 심겠다.

옥수수는 익었다 싶으면 따서 바로 쪄야 한다. 행여 그날 먹지 못하더라도 쪄야 한다. 영양 과학적으로 당분이 탄수화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딴 거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때를 놓치면 그 맛이 안 난다. 가마솥에 찌면 제일 좋겠지만, 어디라도 찔 때는 옥수수 껍질을 바닥에 깔면 향이 배어 더 맛나다. 껍질은 완전히 다 벗기면 안 되고 한 겹은 남겨두어야 뜨거울 때 손잡이로 쓸 수 있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벗겨 먹는 재미가 있다.


15년 전 여름, 아이들을 데리고 양평 계곡에 놀러 갔다. 근처에 사는 친구, O를 불렀는데 금방 오겠다는 친구가 해 넘어갈 때 되어서야 나타났다. 게다가 늦게 온 사람치고 너무 당당한 거다.

뭐냐, 너?

봐라, 내가 뭘 가져왔는지.

O가 커다란 자루를 하나 내려놨는데, 바로 옥수수였다.

이걸 우리 이장님한테 빼앗아 오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수박에, 고기에, 온갖 먹을거리를 챙겨 온 우리로서는 가소로웠다.

아니, 무슨 옥수수 한 자루 가져와서는 그리 생색이냐?

먹어보고 말해라.

O는 큰 솥에 옥수수를 넣고 푹푹 찌는 내내 거만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오래오래 푹 찐 뒤에야 내게 주어진 한 자루의 옥수수. 나는 옥수수가 옥수수지, 중얼거리며 한입도 아닌 반입을 베어 물었다. 그런데, 우왓, 이게 뭔가. 눈이 돌아가는 맛이다. 이런 맛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우리가 그동안 먹었던 옥수수는 옥수수가 아니다. 분명 설탕이나 소금, 뉴슈가도 없이, 아무것도 넣지 않고 오로지 옥수수만 쪘는데, 어떻게 이토록 옥수수 본연의 맛이 나는 건지(먹는 순간 알았다. 그것이 본연의 맛이라는 것을). 옥수수 알갱이는 또 어찌나 부드럽고 연한지, 씹을 것도 없이 입 안에서 녹아버렸다. 앉은자리에서 여섯 개를 숨도 쉬지 않고 먹어 치웠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먹을까 봐 눈치를 봐가면서 초스피드로 말이다(평소 식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O는 더 거만한 자세로 먹는 우릴 내려다봤고, 나는 네네, 맘껏 거만하시고 옥수수만 먹게 해주세요, 굽신거렸다.


토마토 농사를 지으면서 텃밭에 제일 먼저 심은 것이 옥수수였다. 다시 양평 옥수수 맛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옥수수는 씨를 뿌리기도 하고 모종을 하기도 하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두 개씩 심으라고 하셨다. 왜요? 여쭤봐도 대답은 없다. 어르신들은 언제나 키워보면 알아, 표정으로 딱 할 말만 하고 가신다. 역시 키워보니 조금 알 것 같다. 우선 바람으로 수정되기 때문에 가까이 심어야 잘 맺힌다. 또, 뿌리가 얕게 내려서 비바람에 쉽게 넘어진다. 두 개씩 붙어있는 것들은 뿌리가 엉키고 서로 기대면서 잘 버텨주는 것 같다.

알맹이가 맺히고 나서 보니 어떤 것은 두 개씩, 어떤 것은 꽝인 것도 있다. 두 개씩 있는 걸 보면서 아싸, 쾌재를 불렀지만 알고 보니 하나만 크고 또 하나는 아주 작아서 먹을 게 없었다. 그도 아니면 둘 다 비실하든가. 세상사 욕심내어 잘되는 꼴을 못 보는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점차 알맹이가 굵어져서 제법 단단해지기 시작했는데, 그제야 내가 중요한 포인트를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도대체 언제 따야 하는가. 동네 어르신들에게 여쭈니, 수염이 불그죽죽하다가 갈색이 되면 따, 하신다.

매일 들여다보다가 어느 것 하나가 불그죽죽하다가 갈색이 되던 날, 드디어 땄다. 농장 식구가 다 모여 옥수수 하나에 침을 삼켰는데, 아, 지나버렸다. 따야 할 때를 넘겨 퍽퍽한 탄수화물만 남아있었다.

동네 어르신을 옥수수밭까지 모시고 갔다. 에이, 다 쇠었네.

아니, 불그죽죽하다가 갈색이라면서요?

그래. 옥수수수염이 불그죽죽하다가 갈색 기운이 싸악 도는 그때 땄어야지.

뭐, 뭐가 싸악? 에휴... 서둘러 남은 옥수수를 다 따서 쪘다. 한두 개 어린것을 빼고는 이가 부러지도록 딱딱했다.


다음 해 옥수수는 6월 장마가 오기도 전에 태풍이 불었다. 두 개씩 심은 옥수수가 서로 껴안고 쓰러져버렸다. 망했다 싶었는데 해가 바짝 나니까, 저들이 알아서 일어서는 놈들이 있다. 그놈들이 불그죽죽하다가 갈색 기운이 도는 순간까지 버텨주었다. 역시, 그때 따는 게 맞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그 맛은 아니었다. 옥수수도 퇴비가 중요했다. 비료를 쓰지 않았던 우리 땅에는 퇴비를 넉넉히 만들어 넣어야 했는데, 주는 것 없이 땅 기운만 뺏어 먹겠다고 했으니 맛이 있을 리가. 땅은 아낌없이 주지만, 가진 대로 준다.

그다음 해, 옥수수는 내게로 와서 양평의 추억을 떠올려주었다. 주는 만큼,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딱 그만큼.


초당 옥수수가 맛있다고들 한다. 옥수수 마니아로서 얼른 사 먹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음, 나름의 맛이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는 그 옥수수가 아니다(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는 거겠지). 역시 양평의 맛, 대학 찰옥수수가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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