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영화를 보다가 양배추를 채 썰어 샌드위치를 해 먹는 걸 보고 우리도 해 먹자, 오랜만에 남편과 마음이 맞았다. 식빵을 사 오는 동안 남편은 고추지를 다졌다. 듣도 보도 못한 방식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익숙한 레시피다. 샌드위치에 고추지를 조금 다져 넣으면 마요네즈의 느끼함을 잡아주고 매콤한 뒷맛이 개운하다.
고추지를 아시는가? 고추지를 이야기하면 다들 고추장아찌를 떠올리는데, 아니다. 고추장아찌는 간장 식초 설탕에 담그는 것이고 고추지는 오로지 소금에 삭히는 것이다.
동치미 먹을 때 한두 개 동동 떠 있는 고추, 바로 그게 고추지다. 나는 오이지 냉채에도 몇 개 넣어주는데 한여름에 겨울을 끌어다 맛보는 재미가 있다. 너무 매우면 동동 띄운 편 마늘을 씹어 마늘의 단맛으로 매운맛을 달래준다. 아무튼 고추지는 아무튼 고추지(아무튼 시리즈가 유행이라고 알고 있다)를 써야 할 만큼 사랑스런 애착 양념이다.
고추지를 그대로 먹으면 약간 쓰고 지나치게 짜다. 뒷맛에서 단물이 쭉 올라오지만, 첫 입에 이미 이마를 찡그리는 이들이 많다. 물에 담가 짠맛을 좀 뺀 후에 빨갛게 양념하면 입맛 없을 때 반찬으로 훌륭하다. 나는 반찬으로 쓰기보다 주로 양념으로 쓴다.
고추지를 다져서 한 병씩 담아두고 찌개를 끓이거나 국을 끓일 때 뭔가 간이 안 맞거나 깊은 맛이 부족할 때 한 숟갈씩 넣는다. 조미료가 필요 없다. 특히 콩나물국에 좋다. 콩나물국밥집에 가면 대부분 고추지 다진 것이 새우젓과 나란히 나오곤 한다. 바로 그 맛을 집에서 낼 수 있다.
생선찌개에는 필수적이다. 비린내에 약한 남편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만족해한다. 김치찌개에도 다른 양념이 필요 없다. 김치 넣고 고추지만 한 숟갈 넣으면 끝.
김밥에도 당연히 고추지를 다져 넣는다. 다른 재료 아무리 많이 넣어도 고추지를 넣지 않으면, 밥을 다 먹었는데 김치를 한 번도 안 먹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냥 김치김밥을 하면 되지, 하겠지만 김치김밥은 아무리 잘 짜도 김치국물이 흘러나오고, 썰었을 때 색깔도 예쁘지 않다. 고추지는 김치보다 뒷맛을 더 깔끔하게 잡아주고 김밥 재료의 다양한 색깔을 그대로 유지시켜준다. 아삭하게 씹혀서 식감도 좋다. 김밥에는 없는 깊은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참, 고추지를 넣으려면 가능하면 간을 싱겁게 해야 한다. 당근 볶을 때나 계란지단에도 소금을 거의 넣지 않고, 밥에도 가급적 간을 줄인다. 그래도 충분히 맛이 조화롭다. 한 가지 단점은 너무 많이 먹는다는 거. 우웽~
고추지가 가장 많이 쓰이는 때는 명절이다. 우리는 명절이면 무조건 만두를 해 먹는다. 설날은 당연하고 추석에도 송편보다는 만두다. 만두에 고추지를 다져 넣는다. 원래는 형님네 친정의 풍습이었는데 맛있으니까 우리 집에서도 해 먹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집안의 대표적인 음식이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만두(고추지가 들은 만두라고 말하지 않는다. 원래 만두에는 고추지가 들어가는 거니까)라고 답한다.
결혼 초에는 만두를 먹으며 욕을 했다. 만두에 고추라니. 매운맛만 앞세운 음식을 경멸할 때다. 우리 친정은 매운 것을 별로 먹지 않아서 나도 매운맛을 볼 기회가 없었다. 평소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남편에게 오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매운맛으로 덮어버리는 미개한 입맛이라고 흉을 봤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매운맛을 내는 캡사이신에 대해 불만이 많다. 캡사이신의 매운맛은 여전히 잘 먹지 못한다. 그러니 시댁 만두를 먹으면서 얼마나 욕을 했겠는가. 하지만 누가 길들였는지, 고추지의 맛은 나를 중독시켰다. 이제 고추지가 들어가지 않은 일반 만두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나 쫌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이다).
우리 가족은 심각하게 만두 장사를 고민한 적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맛있으니 남들도 맛있어하지 않을까, 하면서 대박을 꿈꿨다. 만두를 할 때마다 한판씩 들고 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맛을 보이던 아주버님이 가장 강력하게 만두 장사를 하자고 밀어붙였다. 한쪽에서는 만두를 만들고 한쪽에서는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수지타산을 해봤는데... 음, 역시 장사로 돈 벌기는 쉽지 않다. 도저히 수익이 나지 않는다. 우리 머리로는 말이다.
맹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고추지를 담갔다. 너무 더우면 고추가 지나치게 약이 오른다. 너무 맵고 빨갛게 익어버리기 전에, 아직은 파랄 때 고추지를 담그기로 했다. 물론 9월 초에 붉은기가 도는 고추로 해도 상관없지만 적당히 솎아내면 병충해도 덜하다. 소금물을 끓여 부어 세 달쯤 삭히면 된다.
그런데 시어머님 말씀이, 아이고 얘야. 모르는 소리 마라. 볕이 여름볕 가을볕 다 달라서 작물은 가을볕을 쬐어야 맛이 든다. 그냥 따먹는 건 몰라도 삭히려면 가을볕 쬔 고추를 삭혀야 맛이 나지럴~하신다.
앗, 어머니 이미 담갔는데요... 솎아내야 해서요.
그래, 너무 촘촘히 심었을 땐 솎아내는 것도 필요하지. 잘했다. 맛있게 무라. 고추가 다 고추지.
체념의 목소리지만 그래도 애쓴 며느리를 추어주신다.
음. 텃밭 농사만 해본 초보농사꾼 티를 있는 대로 냈다. 이제 가을볕까지 쬔 후에 고추지를 담가야지.
앞으로가 걱정이다. 기후 위기로 이번 세기말이면 고추 생산이 89% 감소될 거라고 한다. 다른 농산물도 마찬가지겠지. 고추지를 먹기 위해서라도 기후 위기에 대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