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장아찌

by 천둥


한때 장아찌 담그는 재미로 살았다. 토마토 장아찌를 담그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가을 토마토를 걷으면서 아직 안 익은 파란 토마토만 골라서 간장이랑 설탕, 식초를 넣어 장아찌를 담갔다. 가을 토마토라는 것은 봄에 심은 토마토를 걷어내고 가을에 다시 심은 토마토를 말한다. 보통 노지에 심은 토마토는 늦봄부터 가을까지 따먹지만, 하우스에서는 봄가을로 이모작을 한다. 가을 토마토는 아침저녁으로 기온 차가 심해져서 육질이 단단하다. 쉽게 무르는 여름 토마토보다 장아찌 하기에 좋다.


토마토 장아찌는 바비큐와 먹으면 별미다. 토마토를 사러 온 분들이 토마토 장아찌 맛을 보더니 너도나도 사고 싶어 했다. 선물용으로 조금씩 담그다가 본격적으로 담그게 되었다. 식자재마트에서 포대로 된 설탕과 들통같이 커다란 식초와 간장을 사다가 항아리에 담갔다.

장아찌를 시작하고 보니까 토마토 말고도 장아찌 할 것이 천지였다. 텃밭에 작물을 심어놓고 때를 놓치거나 너무 양이 많아서 버리곤 했다. 그런 것들을 모두 장아찌로 담그면 버려지지 않아서 좋았다. 장아찌라는 방법을 고안해낸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먹을 걸 버리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에 깊이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특히 열무와 가지가 그랬다. 질겨진 열무와 가지를 장아찌로 담그면 연해지고 깊은 맛이 났다.

요즘은 아예 김치통에 장아찌용 간장을 반쯤 담아놓는다. 그때그때 가져오는 작물들을 추려 바로 먹을 것은 봉지에 담아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는 장아찌용 김치통에 누질러 놓는다. 깻잎이 가장 많고 고추와 가지, 열무, 고춧잎도 장아찌 행이다.


어릴 때 매년 봄이면 산나물을 먹었다. 엄마랑 아버지는 4월 어느 날 산나물 따는 여행을 다녀오셨다. 초저녁잠이 많았지만, 그날은 아무리 늦더라도 안 자고 기다렸다(그러고 보니 어느 산에 다녀오신 건지 한 번도 여쭤보지 않았다. 다음에 꼭 여쭤봐야지. 내 몸속 어딘가에 깃든 산나물의 출처가 궁금하다). 엄마 아버지는 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하셨는데, 두 분 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얼굴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엄마는 배낭에서 푸릇푸릇한 산나물을 한가득 꺼내 데쳤다. 우리는 졸음에 겨워 눈을 껌벅거리면서도 몇 입 더 먹겠다고 아웅다웅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밥이랑 쌈을 싸 먹었는데 그게 더 맛났다. 어린 입맛에도 그 쌉싸르한 걸 먹고 나야 제대로 봄이 왔다고 여겨졌다.

그날도 맛있는 산나물 먹을 기대에 밥상 앞으로 달려갔는데 산나물이 없었다. 어, 왜 없지? 두리번거리는데, 부엌에 간장 달이는 냄새가 그득했다. 엄마, 산나물은? 물어보는 동시에 엄마가 씻어놓은 산나물을 냄비에 그대로 쏟아 붓는 게 아닌가? 악~~ 엄마! 때가 조금 늦어서 산나물이 질겨졌다는 것이다. 장아찌도 맛나다, 묵어봐라. 엄마는 말했지만 나는 그 장아찌가 꼴도 보기 싫었다. 내 봄을 앗아가다니. 간장에 빠진 봄이라니.


이웃분께 토마토 장아찌를 선물했더니, 하루는 우리를 집으로 부르셨다. 마당에 오가피나무와 엄나무가 있으니 마음껏 따서 장아찌를 담그라고 했다. 오가피 순이나 엄나무는 첫 순이 나올 때 따서 데쳐 먹는데, 장아찌용은 주로 두어 번째 나오는 순으로 한다.

며칠에 걸쳐 나무에 달린 이파리를 몽땅 따냈다. 사다리도 없이 나무에 매달려 순을 따서 장아찌를 담그고, 다음날 또 따서 담그느라 팔다리가 남아나질 않았다. 그런데도 따는 재미에 나무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담가놓은 장아찌들을 한데 섞어놓으면 더 향이 좋아졌다. 장아찌를 맛보고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준 장아찌도 이 맛이었겠구나. 봄나물을 장아찌로 만들어버린 이후 쳐다도 보지 않던 장아찌를 원도 없이 담갔다.


유명한 농산물 플리마켓에 갔는데 어떤 분이 현미밥에 장아찌를 넣어 김밥을 말아서 팔았다. 들어간 것도 별로 없고 크기도 작고 꽤 비싸기까지 했는데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김밥을 좋아하는 남편조차 굳이 사 먹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잘 팔리니까 궁금했다. 젊은이들은 왜 이걸 사 먹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중들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이런 거다. 도시락 반찬으로 장아찌가 꽤 좋다는 거.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특히 더 입맛을 깔끔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거.

요즘처럼 삼식이들과 지내야 할 때는 장아찌 같은 저장 음식이 한두 가지 있으면 꽤 든든하다. 혼자 간단히 해 먹는 볶음밥 등에도 어울리고 물 말아 훌훌 먹기에도 좋다(여름에는 그저 물 말아 먹는 것이 최고다). 물론 한 상 차려 먹을 때도 반찬 가짓수를 늘려주니 기특하다.


그래도 짠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사실 장아찌 먹을 일이 별로 없다. 고기나 생선 먹을 때 개운하게 한 젓가락 먹는 정도다. 순전히 만드는 재미다. 장아찌 담그기가 끝나면 여름도 끝나간다.

그 많던 장아찌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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