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자이저, 호박

텃밭 예찬

by 천둥

만약 내게 집 한 채 지을 땅이 있다면 북 스테이를 하겠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만약에 북스테이 (brunch.co.kr). 사람들에게 맛있는 여름 음식을 해주는 재미를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요리에 재주도 흥미도 없던 내가 텃밭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복감을 알게 되었다.


처음 텃밭을 했을 때 여름이면 호박과 깻잎 자라는 것만 봐도 배가 불렀다. 남들은 여름에 더워서 입맛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텃밭 덕분에 여름이 가장 입맛이 돋았다. 하룻밤이 지났을 뿐인데 텃밭은 그 시간을 먹고 햇빛을 먹고 바람을 먹고 손길을 받아 우리에게 가장 최고의 먹거리를 내어줬다. 분명 우리가 심은 건 맞지만, 어제 먹었는데 오늘 먹을 게 또 있고 내일도 또 먹을 게 생기다니, 이럴 수가. 곳간이 가득 찬 사람처럼 마음도 넉넉해져서 어지간한 걱정거리는 하찮게 여겨지고 아무 때나 웃게 했다. 이 풍요로움을 오롯이 나 혼자 누리고 싶어서 농장 식구들 밥은 내가 하겠다고 선언했다. 매끼 밥해먹는 일을 고역처럼 여기던 내가 밥 담당을 자청한 것이다.


새벽에 텃밭에 나가면 우선 밤새 올라온 깻잎순을 후루룩 딴다. 넓은 잎도 몇 개 딴다. 잔 멸치와 양파 넣어 바글바글 끓일 거니까 고추도 몇 개 챙긴다.

어제 보아둔 호박을 찾아 호박잎을 들추면 거기, 어제와는 다르게 딱 적당히 자란 호박이 숨어있다. 호박을 꺾으면 줄기에서 즙이 샘솟는다. 에너지다. 줄기식물은 나뭇가지에서 따는 작물과 달리 눈에 보이는 즙, 생생한 에너지를 보는 맛이 있다. 어쩌면 이 즙을 보기 위해 호박을 키우는 게 아닐까 생각할 만큼 그 순간이 좋다. 꺾인 가지에서 샘솟는 즙을 한참 들여다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린다. 호박에 즙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아버지다. 아버지는 진액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요즘엔 야채에 진액이 없으니 먹으나 마나라고 한탄을 하셨다. 호박이 다 호박이지, 진액이 나온다고 뭐가 다른가, 했다. 처음 농사를 짓고 호박을 따면서 바로 이거였구나,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서 아버지의 한탄이 이해가 갔다. 진액이야말로 땅의 에너지다. 땅의 에너지가 담긴 작물이야말로 진짜 먹거리다. 마트에 가면 손쉽게 단백질 가루며 비타민이며 뭐든 살 수 있지만 이 에너지만큼은 땅이 아니고는 얻을 수 없다.


흐뭇하게 즙을 들여다보다가 호박을 바구니에 담고 다시 여기저기를 눈으로 살핀다.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하는 호박의 위치를 알아두는 것이다. 내일을 위해 쟁이는 즐거움이 있다. 매일 살펴도 어디엔가 숨어서 다 자란 모습만 보여주는 것들도 있다. 나중에 발견하는 깜짝 기쁨이 되어줄 테니까 짐짓 모르쇠 한다.

호박은 가격이 싸서 농사가 쉬운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렇게나 심겨 있는 것에 비해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다. 퇴비도 많이 줘야 하고 신경 써서 수정을 해줘야 열린다. 처음에는 그걸 모르고 왜 호박이 안 열리나 의아해했다. 분명 꽃은 피는데 열매가 잘 맺히지 않았다. 어른들께 여쭤보니 수꽃을 따서 암꽃에 뽀뽀를 시켜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오호, 뽀뽀를 해줘야 열리는 작물이라니, 너무 로맨틱하잖아. 그럼 암꽃과 수꽃을 어떻게 알아보나 했는데 꽃송이 안쪽이 다르단다. 딱 보니 알겠다.


이제 호박잎이다. 줄기를 따라 곁순을 제거하면서 끝에 돼지꼬리를 달고 있는 이파리를 딴다. 이파리만 밭게 따지 않고 좀 넉넉히 길게 줄기까지 딴다. 따자마자 바로 껍질을 벗겨준다. 껍질이라기보다는 잎맥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 아무튼 이게 좀 질기다. 손질하는 것을 번거로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벗겨져나가는 쾌감을 즐긴다.

호박잎과 조금 길게 꺾은 줄기는 분리해서 따로 챙긴다. 호박잎 하면 당연히 강된장인데 나는 이게 좀 어려웠다. 된장을 적게 넣으면 너무 묽고 많이 넣으면 너무 짰다. 양파나 감자를 많이 다져 넣기도 하고 두부를 듬뿍 넣기도 했지만 원하는 맛이 아니었다. 그러다 형님이 호박잎 찌는 걸 보면서 알게 되었다. 이 줄기를 잘게 잘라서 된장에 넣는 것이다. 오호라, 이런 비법이 있었군. 그 뒤부터는 호박잎만큼 줄기도 챙긴다. 양파나 감자, 또는 두부보다 강된장의 맛을 해치지 않고 더 호박잎 고유의 맛을 즐길 수 있다. 돼지꼬리 달린 이파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거다. 쌈을 쌀 때 같이 먹어도 맛있고 강된장에 넣어도 맛있다.

참, 호박잎 찔 때 아까 딴 깻잎 중에 넓은 잎을 같이 찐다. 호박잎 먹는 중간중간 깻잎을 싸 먹으면 마치 강약 중간 약 같은 느낌으로 질리지 않게(절대 질릴 일 없지만) 더 많이 먹을 수 있다.

미국에 사는 큰언니는 어쩌다 한국에 돌아오면 매 끼니 호박잎만 찾는다. 가장 그리운 음식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어떻게든 구해서 먹을 수 있는데 호박잎만큼은 쉽지 않단다. 쌈 채소들과는 또 다른 특이하고도 색다른 식감과 구수한 맛. 누군가 호박잎을 수출한다면 단언컨대 한국을 대표하는 채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한 상 준비를 마쳤다. 강된장에 호박잎, 호박볶음, 깻잎 순 조림. 옆에 고추장이랑 꽈리고추 몇 개 놓으면 훌륭한 여름 밥상이 된다. 너무 담백한 거 아니냐고? 그럼 깻잎이랑 호박 넣어 부침개 몇 장 부쳐주지 뭐. 단백질이 없다고? 호박볶음을 새우젓으로 간했는데? 그래도 아쉬우면 강된장에 우렁이를 조금 넣어주지 뭐. 영양가 골고루 챙겨 먹는 것보다 즙이 가득한 작물로 만든 밥상이 훨씬 많은 에너지가 생길 것이니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

거, 그냥 집밥 아니요? 오, 노노! 집밥과는 차원이 다른 생기 밥상이다. 텃밭은 생기를 준다. 똑같이 호박이고 깻잎이고 된장으로 만들지만, 조리법도 결과물도 생긴 것은 같지만 결코 같지 않다. 텃밭이 생기를 내어주었고 내가 요리하면서 신명하게 했고 먹으면서 그 어느 진수성찬보다 만족스러우니까.


점심에는 국수다. 그냥 국수가 아니고 호박을 고명으로 잔뜩 올린 국수다. 호박을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볶는다. 국수 반 호박 반이 될 정도로 호박을 많이 넣어야 제 맛이다. 양념장과 비벼먹으면 완전 별미다. 다이어트에도 좋다. 사실은 점심때보다 야식으로 자주 먹는다. 호박볶음은 이왕 할 때 많이 해둔다. 남으면 다음날 비빔밥에 넣어 먹으면 되니까.

거기에 달전까지 부치면 완벽하다. 달전은 애호박을 나박나박 썰어서 전을 부친 건데, 남편에게서 처음 들었다. 달전이라니, 어쩌자고 이렇게 고운 이름을 붙였을까? 지금도 호박에 밀가루를 묻히고 있으면 남편이 달전 하게? 묻는데, 그 말이 어찌나 달달한지 남편마저 이뻐 보인다. 달전의 맛이야 아는 그 맛이다. 하지만 달전이잖아. 달을 먹는 기분이잖아. 달전은 베어 물거나 한입에 먹거나 야금야금 잘라먹거나 초간장에 찍어먹거나 어떻게 먹어도 달빛을 머금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야채를 먹는다고 하면 주로 샐러드를 떠올린다. 그런 걸 볼 때마다 안타깝다. 잎채소는 몸이 찬 사람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다. 소화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게다가 샐러드 한 접시 먹어봤자 호박이나 가지 같은 열매채소 하나 먹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무려 달빛의 에너지라니까. 그러니까 노래를 바꿔야 한다. 호박 같은 내 얼굴, 미웁기도 하지요, 가 아니라 호박 같은 내 얼굴, 건강하기도 하지요, 눈도 촉촉, 코도 촉촉, 입도 촉촉, 촉촉.

늦은 여름까지 호박과 호박잎을 따먹다가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단호박 수프가 당긴다. 호박 덩굴 여기저기에서 단내가 풍겨온다. 한바탕 축제 같은 여름 작물의 시간이 끝나가는 시기다. 저장 작물의 시간, 가을이 온다.


도심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정든 동네를 떠나는 것보다 이제 텃밭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아쉬웠다.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니다가 부동산 바로 앞 길가에서 할머니들이 호박과 상추, 가지 등을 바구니에 담아 파는 것을 보았다.

나, 여기가 좋아.

더는 집을 보러 다니지 않고 그곳에 정착했다. 다른 어떤 조건보다 텃밭 호박을 살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끌었다. 남편은 어이없어했지만, 무모한 선택을 할 만큼 여름 작물을 애정한다. 그리고 주말농장을 찾아 텃밭을 분양받았다.

바스락거리는 우리네 삶에 풍요로운 텃밭 하나쯤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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